흙사랑 한글학교 가는 길
흙사랑 한글학교 가는 길
  • 편집부
  • 승인 2012.12.05 23:53
  • 호수 17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흔이 넘은 어르신들에게 배움은 꿈같은 행복이다

어머니들에게는 학교를 못 다니고,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까막눈이 돼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여자가 배워서 뭐하냐며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고, 끼니 걱정에 학교를 다니는 건 꿈도 못 꿀만큼 가난했고, 하필이면 막내 동생이 갓난쟁이라 동생을 업어 키워야했고, 글 같은 거 몰라도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부모도 있었다. 하지만 60년 세월이 흐르면서 글을 모른다는 것은 어머니들에게 한(恨)이 되었다. 그래서 내 이름 석 자가 간절히 쓰고 싶어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들의 용기 있는 도전이다. 그것은 몰래 짝사랑만 하던 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 농사짓던 손으로 연필을 잡고
한글을 배우시던 어르신들에게 학교 이름을 공모했었다. 그래서 채택된 이름이 바로 '흙사랑’이다. 현재 흙사랑 대표를 맡고 있는 임재선(70) 어르신이 지었다는 이 이름에는 '땅을 일구다가 그 손으로 배움의 싹을 틔운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2007년 '흙사랑’이란 이름으로 출발해 지금은 서울누비 2층에서 3년 째 학교 문을 열고 있다.

흙사랑에 오는 것이 사실은 부끄러웠다. 한글을 모른다는 것은 감추고 싶은 상처다. 행여나 남들이 알까 걱정도 됐다. 그동안 글자만 보면 두근두근 가슴 졸이며 살아왔는데, 용기 내어 흙사랑에 오니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학교에 다니게 됐고, 내 손으로 이름을 쓰게 됐고, 글을 읽게 되자 당당하게 어깨가 저절로 펴졌다. 어르신들의 마음에 세상을 살아가는 든든한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흙사랑에서 한글을 배우시는 어르신들의 마음은 “정말 기분이 행굴나이드를 타고 하늘나라 다니는 기분이람니다." -흙사랑 한글학교 이후순 어머님의 글 <흙사랑에 오면, 신바람이 난답니다> 중 일부-

친구들이 여덟 살 때 간 소풍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처음 가봤다. 흙사랑 어르신들은 봄, 가을 소풍을 가고 여름에는 물놀이도 간다. 봄 소풍 때는 속리산, 삼년산성, 둘리공원 등 지역 내에 있는 가까운 곳에 가서 운동회도 연다. 아이들 마냥 신나게 달리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물놀이 가서는 물장구도 치며 너무 행복해하신다고 한다. 몸은 나이를 먹었지만 마음은 어린 소녀의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에는 글쓰기 대회 참석 겸 소풍을 간다. 지금까지 부산, 국회의사당, 청와대 등을 다녀왔다.

흙사랑 어르신들의 글 솜씨는 이미 전국을 강타했다. 본지 할머니 기자로 활동하는 어르신들의 글이 알려져 여러 방송사에서 취재도 하고 출연도 했다. 각종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올해는 한글날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 10회 문해한마당 글쓰기 대회에 흙사랑 한글학교 어머니 네 분이 정성 글 상, 바른 글 상, 마중물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들의 글을 읽고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감동을 받고 눈물도 흘린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재주다. 세월을 잘못 만난 어르신들의 비통한 심정을 알 것 같다.

흙사랑에 다니는 어르신들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한다. 한 평생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하나 갖는 것이다. 모진 세상을 헤치며 열심히 살아온 삶이기에 어르신들에게는 생명처럼 값진 인생인 것이다. 어르신들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2012 사회문화예술교육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흙사랑 한글학교 어르신들이 '웃음과 감동, 나만의 자서전’ 쓰기를 진행해왔다. 연말에 있을 흙사랑 한글학교 학습발표회 때 어르신들이 집필한 자서전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 영어, 한자 수업도 재밌어
흙사랑은 한글만 배우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흙사랑에서는 글쓰기, 영어, 한자, 수학도 배울 수 있다. 한글을 배운 어르신들이 계속해서 배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목적이지만 글쓰기, 영어, 한자, 수학 과목에 관심이 있는 많은 어르신들이 함께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게 박옥길 사무국장의 바람이다. 현재 영어와 한자, 수학 수업에는 일반 어르신들이 많이 참여해 수업을 받고 있다.

흙사랑은 어르신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글을 몰라 생활 속에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어르신들이 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돕고, 다른 어르신들에게도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드리고 싶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공부, 흙사랑에서 맘껏 하실 수 있으면 좋겠다.

“봄이오니 다 좋은데, 나만 안 좋았다. 아직 한글도 다 못 배웠는데, 세월만 자꾸 가서 싫었다" -흙사랑 한글학교 임재선 어머님의 글 <개구리는 '개굴개굴’, 호랑나비는 춤을 추며 난다> 중 일부-

 

#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선생님이 생겼다. 자기 일 하는 것도 바쁜데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와 어르신들의 선생님이 돼주는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이다. 흙사랑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배움에 뜻을 같이 하고 응원하는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봉사자들이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여러 명의 봉사자들이 동참하고 있다.

봉사자 선생님들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르신들은 스승의 날이나 연말이면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흙사랑을 돕는 손길은 봉사자 선생님들만이 아니다.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연필이며 공책을 기부하는 등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특별 후원금을 내주기도 하고, 정기 후원자가 되어 매월 소중한 회비를 납부해 흙사랑 운영에 힘이 돼주고 있다. 어르신들의 배움을 응원해주는 후원자들이 있어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흙사랑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자원봉사 선생님과 후원자들이 있어서 흙사랑 어르신들의 배움의 열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박옥길 사무국장이 건네준 흙사랑 한글학교 어르신들의 글을 담아 발행하는 “흙사랑-나눔과 소통"이란 책자를 받아들고 집으로 와서 읽어보았다.

한글을 배운 어르신들이 일기를 쓰고 편지도 쓴다. 그 글에는 어르신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속상함도 있고 기쁨도 있다. 한 맺힌 지난날의 슬픔도 있고,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있고 감사함도 있다. 그리고 글을 배운 어르신들의 행복이 담겨져 있다. 어르신들의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있을 줄 몰랐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들이 가슴에만 묻어두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어르신들이 글을 배우게 돼서 다행이다.

이젠 버스 앞에 붙여놓은 이정표도 읽을 수 있어서 버스를 잘못 타지도 않는다. 남편 앞에, 자식들 앞에, 손주들 앞에 자신이 자랑스럽다.

그전과는 달라진 삶이다.
스무 살 꽃다웠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어르신들에게는 만약 스무 살이라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운전을 배워 붕붕 하늘 높이 달려 보고 싶은 꿈(황예순), 멋진 여장부가 되어서 전국을 누비면서 멋지게 살고 싶은 꿈(임재선), 대학에 가서 공부 마치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싶은 꿈(김옥환), 발레도 하고 대형 운전도 하고 수영 선수도 하고 싶은 꿈(이후순), 운전을 해서 애인하고 마악 달리고 싶은 꿈(장순임), 짧은 치마 입고 선생님 하고 싶은 꿈(정관임), 운전해서 병원에도 가고 딸집에도 가고 공부도 하고 싶은 꿈(허매자), 그저 공부가 제일 하고 싶은 꿈(이종언, 문순덕, 최이화, 손계남, 김갑희, 장종남)이 있다.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고, 그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도 생긴다.
어르신들의 흙사랑 한글학교 가는 길이 언제나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김춘미 시민기자

 

흙사랑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실천으로 활동하는 모임입니다.
흙사랑 한글학교 후원 계좌
농협 315-01-158134(예금주 흙사랑)
일반회원: 월 10,000원     후원회원: 월 5,000원 이상
전화 043-542-101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