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화운 선생의 속리구곡시 현장탐방
특집… 화운 선생의 속리구곡시 현장탐방
  • 편집부
  • 승인 2009.11.05 11:41
  • 호수 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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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알프스 시작되는 아름다운 마을

약 100여년 전, 마로면 관기1리에 와서 터를 잡고 활동한 화운 민우식 선생이 남긴 속리구곡시가 발견됐다.  화운유고에 담긴 속리구곡시는 1곡 화개동, 2곡 북두문, 3곡 서원촌, 4곡 황애동, 5곡 도치, 6곡 안도리, 7곡 흠앙곡, 8곡 용진, 9곡 삼가동으로 구성됐다. 1곡에서 9곡까지 속리구곡시를 소개하며, 그 경관을 답사한 느낌 또한 함께 싣도록 한다.       - 편집자 주 -

 

속리구곡시 3곡

三曲書院村(삼곡서원촌):
삼곡은 서원마을이라

三曲深深澗一村(삼곡심심간일촌):
셋째구비는 어디인가? 깊고 깊은 시냇가에 자리 잡은 한 마을

象賢書院此中在(상현서원차중재):
마을 가운데 상현서원 있네.

風塵不入靑山은(풍진불입청산은):
풍진이 들지 못하니 청산도 편안한데

白首閑翁課穉孫(백수한옹과치손):
흰머리의 한가한 늙은 선생님, 어린 손자들 가르치고 있더라.

 

상현서원 안에는 김정 선생의 충암집 5권과 성운 선생의 대곡집 3권 목판을 보관하여 왔으나 유실됐다고 한다.
상현서원 묘정에는 1778년(숭정 3년 무술)에 세운 우진각 지붕의 묘정비각이 서있고, 그 안에는 통정대부 예조참의 김양행이 짓고 봉훈랑 수 사헌부 장령 김종후가 쓴 묘정비가 있다. 1949년 김명구가 쓴 중수기가 편액되어 있기도 하다.
이 서원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교 주최로 기광장과 유림, 그리고 그 후손들이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참고문헌 보은의 원사-김건식 전교 편저)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필자는 지난 10월26일 서원촌을 찾았다. 여기서 신국범(장안면 서원권역 농촌개발사업 운영위원장)씨의 말에 따르면 1990년 이곳에는 서울 강남에 있던 제일고시학원이 이곳 서원리로 내려와 학원을 개설했고, 유명 교수와 강사들이 명 강의를 함에 따라 학원생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여러 채의 교사를 세웠다고 한다.
또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학원생은 500여명을 넘었고, 수강생 중 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 등에 합격한 학생의 수가 충북 도내 합격생의 80%를 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고시원으로 바뀌어 그 당시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마을 뒤에는 마을 형성당시에 세워진 산제당이 있다.
이곳에서 매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봉행한다.
또한 서원리에서 충북 알프스의 진입이 시작된다. 지금도 많은 등산객이 이곳 서원리를 찾는다.
이밖에 서원권역에서는 현재 농촌개발사업이 추진중에 있다. 각박해지는 현실속에서 상현서원 인근에 건물을 건설, 인성 교육을 위시한 전통예절, 한문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방안을 추진중에 있다.
서원촌은 과거 상현서원이 있어 많은 학자를 배출했고, 현대에 와서는 제일고시학원이 있어 많은 고시 합격생을 배출하였으니 과거나 현재나 한 번 서원은 영원한 서원인가 보다.
한 번 훼손된 자연은 천년을 가도 회복되지 않는다. 앞으로 자연을 잘 보전하는 차원에서 잘 개발한다면 눈부신 미래발전을 기약하리라.

 

◆자연은 학문과 도의의 모체
여기서 작자 화운선생께서는 제1곡 화개동을 시작으로 2곡 북두문을 거쳐 3곡 서원촌에 다달았다.
서당에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늙은 선생님, 몸을 전후좌우로 흔들며 글을 읽는 아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인성의 수양을 자연에서 체험하면서 배우고자 옛 선인들은 경관 좋은 곳을 찾아 서당, 서재 등을 지어 자신을 수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 서원촌의 모습
장안면 황곡리 황의호씨의 말에 따르면 현재 속리산면과 장안면은 옛날 속리면으로 면사무소는 서원리에 있었다고 한다.
해방전 장안리로 이전하고, 경찰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는 속리산면 상판리에 있었다.
8.15 조국 광복을 맞은 주재소 인근 주민들은 일제의 모진 학정에 격분해 주재소를 불지르고 그 여세를 몰아 장안리로 달려와 속리면사무소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일제 폭정당시 속리 주재소 순사(순경)가 순찰차 장안방면을 오갈때에는 말티재나 회넘이재를 걸어서 넘어야 하는데 장안방면으로 올때에는 주재소 인근 주민들이 순사를 업고 말티재나 회넘이재를 넘겨 주었고, 용무를 마치고 상판리 주재소로 돌아갈때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장안리 주민들이 업어서 높고 험한 재를 넘겨 주었다는 말을 어렸을 때 어르신들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말도 전했다.
이는 일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무서운 폭정을 했으며 우리민족에게 인간이하의 만행, 또는 악랄한 학대를 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4곡, 다음호에 계속
김광수 기자

바로잡습니다
2곡 마지막 구절 這理微芒造化渾(저리미망조화혼) 중 芒(망)자를 茫(아득할 망)으로 바로잡습니다. 독자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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