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처럼
새들처럼
  • 편집부
  • 승인 2011.11.17 10:03
  • 호수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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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수필가, 보은이평)

흰 눈이 오기 전에 날아가려는 억새가 위기에 처한 새들처럼 한껏 깃을 부풀렸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억새가 가장 풍성하고 부드럽고 탐스럽다. 바람을 이리저리 휘젓는 춤사위는 거칠어진 마음의 작은 흠집까지 매끄럽게 쓸어준다. 마치 미장공의 흙손이 된 듯 되풀이되는 손길에 포근한 감정의 결이 살아난다.

헌데 억새에 탄성을 보낸 지는 벌써 몇 달 전이다. 잠깐씩 여름의 열기가 훅 하고 느껴지지만 하늘은 가을빛을 성급히 담아낼 즈음 분홍빛 꽃대를 찰랑이며 막 피어나는 억새는 정말 예쁘다. 단발머리 소녀의 비단결 머리카락처럼 윤기가 흐르고 단정하다. 그동안 지쳐있던 더위 속에서 반가운 가을의 전령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흔히 억새가 모여 비비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사람들과 같다고 한다. 간혹 가까운 거리 때문에 서로 상처를 나누기도 하지만 어우러져 살아가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널리 퍼질수록 아름답고 서로에게 더 큰 힘이 된다. 지금 우리 집에서는 서호가든 의 둑길이 산책하기에 가까워 자주 찾는 곳이다.

봄이면 그 길은 풀무더기가 여기저기 물 위에 꿈처럼 떠있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풀도 이렇게 흔하지 않았다. 참나리나 띠풀, 개망초가 흐드러지기 전에 소나 돼지의 먹이로 자라기가 무섭게 베어져 나갔다. 무릇, 갈퀴덩굴, 패랭이도 지금에서야 더 자주 만난다. 물가의 버드나무 밑동에 우렁이가 주황색 알을 슬고, 백로와 원앙이, 청둥오리들도 번갈아 먹이를 찾는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든 고라니도 풀밭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 평원에서의 자유와 평화를 나름대로 한껏 느끼며 행복하게 길을 오고 갔는데 어느 날 초원의 한 구간이 몽땅 사라졌다. 가축의 사료로 쓰기 위해 수십 개의 곤포 속에 잘려나간 풀밭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허긴, 먹는 것이 더 중요하지." 씁쓸한 마음을 그렇게 달랬다.

결혼 후 처음으로 삼십 평 조금 넘는 마당을 가꾸었을 때다. 미뤄두었던 욕심이 넘쳐 여러 종류의 나무도 심고 들판의 정서를 한 귀퉁이 옮기고 싶어서 억새와 감국, 맥문동, 머위까지 심었다. 그런데 그들의 강한 번식력이 연약한 화초를 몰아내며 세를 불리는데 뒤처리에 석삼년이 걸렸다. 악착스레 뻗어있는 뿌리를 말끔히 캐내도 이듬이면 엉뚱한 곳에서 또 싹을 내밀기 때문이다. '밖의 것을 함부로 울안에 들이면 안 되겠구나.’ 하고 몸소 느꼈다.

점점 다가오는 가을이 서호가든 에서 하수처리장까지의 억새밭을 은빛으로 몰고 온다. 짐승의 먹이로 비워졌던 풀밭은 키는 작아도 가까스로 제빛을 채우고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래도 한낮의 햇살은 뜨거워서 아직은 계절의 한산한 정취를 느끼기엔 이르다. 며칠 후 모처럼 선선한 바람이 불어 저녁나절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찾았다. 마른풀 냄새 속에 억새는 휑하니 빈자리만 넓게 남기고 또다시 사료가 되어 솜이불처럼 뭉쳐 있었다. 그곳을 안식처로 삼았던 새와 미물들은 한순간에 보금자리를 잃었다. 마치 터전을 버리고 떠난 시골 마을풍경처럼 허전하다. 이곳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기도 했는데... 그렇게 꽃 타령, 풀 타령 하다보면 소는 누가 키울 거냐고 하겠지만 여럿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운동을 위해 꾸준히 그곳을 찾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의 피로회복제가 되기도 하니까...

이번 대추축제 기간에는 주민을 비롯한 이십구만 여명의 인파가 행사장을 찾았다고 한다. 축제장에서 가까운 1km 남짓한 그 들판에 억새 길을 조성하면 어떨까? 콤바인이 오갈 수 있는 평평한 땅이니 흙길을 만드는 것에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마른풀위에 마음을 싣고 살랑살랑 같이 조리질 하며 걷다보면 일상의 불필요한 응어리가 좀 걸러지지 않을까? 방문객들의 자투리 시간에 덤으로 또 다른 선물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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