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3)
황무지 (3)
  • 보은사람들
  • 승인 2024.01.11 09:28
  • 호수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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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 수
속리산면 거주
시인, 수필가
충북작가회의 회원

새해가 찾아왔다. 시인과 함께 걷고 있는 황무지가 아직 남아 있다. 2 년째 걷고 있는 셈이다. 이제 곧 황무지가 끝나고 봄기운 피어나는 푸른 초원이나 싱그러운 숲이 나타날 것을 믿으며 조금만 더 걸어가보자.

광부의 피와 살점이 말라붙은 혈은 도록꼬
폐역에는 달이 떴다
텅 빈 교회당 다 삭은 생철 지붕에
십자가 그림자
비뚜로 누이고
양인 당인, 광산가의 아버지, 성당의 목사도
기업과
술집과 여막을 따라 떠돌아가고
궤도의 무수한 침목
끝없는 레일이 끝없이 흐르고 휘이고
썩은 버섯 질긴 비듬풀!
녹슨 궤도에 엉클어졌다


이 시 「황무지」는 같은 장시인 「전쟁」과 함께 시인이 등단 전후 습작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원고지 한 칸 한 칸에 심혈을 기울인 시인의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당시, 근대 시문학에서 몇 안 되는 시도의 장시이면서, 세계사적, 전 지구적 전망의 미학적 접근이라는 의미로 평가받게 된다. 특히 일제의 치하에서 황무지라는 제목부터 불순한 것이어서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만 발표되고 나머지 육필 원고가 수 십 년 뒤에야 발굴되는 기구한 운명이 시인의 삶과 닮아있는 작품이다. 


해설피 장마철엔
번갯불이
쐉 쐉 하늘과 구름을 갈라
다이너마이트 폭발에
산맥도 광부도 경기도 웃음도 깨어진 다음
비인 대합실 문 앞에는 석탄 쪼가리
싸늘한 달밤에
잉, 잉, 잉, 돌덩이가 울고
무인경에
달빛 가득 실은 헐은 도록꼬가 스스로이 구른다
부엉아! 너의 우는 곳은 어느 곳이냐
어지러운 회오리바람을 따라
불길한 뭇 새들아 너희들의 날개가 어둠을 뿌리고 가는 곳은 어느 곳이냐
                                  (1937년 작, 「황무지」 중 3장)              


‘폐역에 뜬 달’, ‘썩은 버섯과 녹슨 궤도’, ‘빈 대합실과 싸늘한 달밤’, ‘어둠을 뿌리고 가는 곳’의 이미지들은 여전히 어둡고 비관적이지만, 황무지 아래 깊숙이 숨죽이고 있던 뜨거운 열망이 화산처럼 터져 나올 것이라 희망하고 예언하고 있는 것, 그것이 시인의 의지이며 시정신에 다름 아니다. 
  시인과 함께한 황무지는 이제 모두 지나고, 다음 호부터는 꽃길을 걸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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