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2)
황무지(2)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12.28 09:24
  • 호수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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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 수
속리산면 거주
시인, 수필가
충북작가회의 회원

올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오고, 12월이 오고, 이해의 마지막 주가 왔다. 가지 않을 것 같던 묵은 해는 가고 새해가 온다. 시대는 그렇게 장을 바꾸며 새로운 국면을 요구하고, 역사는 우리를 가보지 않은 새로운 우주를 향하는 길을 내어준다. 그 길은 황무지를 지나기도 하고, 푸른 초원이거나 따스한 마을이거나 아름다운 동산을 지나가기도 한다. 시인과 함께 건너가는 황무지를 조금 더 걸어 보기로 하자. 

저렇게 싸늘한 달이 지구에 매어달려
몇 바퀴를 몇 바퀴를 몇 바퀴...를 한없이 돌아나는 동안
세월이여!
너는 우리에게서 원시의 꿈도 걷어들였다
죽어진 나의 동무는 어디 있느냐!
매운 채찍은 공간에 울고 
슬픔을 가리운 포장 밖으로 시꺼멓게 번지는 도화역의 크단 그림자
유리 안경알에 밤안개는 저으기 서리고
항상
꿈이면 보여주든 동무의 나라도
이제 오래인 세월에 퇴색하여
나는 꿈속 어느 구석에서도 선명한 색채를 보지는 못하였다
우거진 문명이여?
엉클은

너는 우리게 무엇을 알려주었나     (1937년작 「황무지」 중 2장)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 커다란 재해로 발생한 대규모의 이재민과 그들을 만주와 북방 개척에 동원하고자 한 일제의 정책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북방의 황무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시인은 식민지에서 지배당하고 있는 소시민성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농민과 청년을 각성시키고, 시인 스스로의 자아반성과 내면적 전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황무지와 대비되는 ‘풀’을 통해 역사의 순환성과 새로운 재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두었다.
‘죽어진 나의 동무’, ‘매운 채찍’, ‘슬픔’, ‘그림자’, ‘밤안개’ 등의 어두운 이미지가 표현된 시어의 행간에 동포애와 격려, 행복한 일상과 빛나는 꿈을 향한 밝은 이야기를 숨겨두지 않았을까. 이 황무지에 풀이 자라고, 사람이 모이고, 마을이 생겨나는 역사의 순환성을 믿고, 가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가고,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도 기어이 올 것임을 믿고 기대하지 않았을까. 지금 시대에 사는 우리는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역사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내던 시인에게는 간절하고도 쉽지 않은 희망이요 예언이었다.

* 시인의 황무지는 시대가 바뀐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드러나기도 한다. 황무지보다 더 힘든 올 한 해를 잘 견뎌내신, 그러면서도 함께 희망을 만들어가는, ‘오장환 시 다시 읽기’란을 통해 시인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신 독자들께 가슴 따뜻한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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