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상조의 공동체 정신이 강한 삼승면 선곡리
상부상조의 공동체 정신이 강한 삼승면 선곡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12.21 09:58
  • 호수 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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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의 중심에 있던 탁지부 대신 어윤중이 머물렀다고 전해 지는 선곡리 지금도 보은 지역 유일한 초가집을 보존하고 있다. 
이번주는 신선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삼승면 선곡리를 소개한다. 
삼승면 선곡리는 보은읍 남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아침 일찍 탐방 준비를 하고 출발하기 전 달력을 보니 24절기 중 21번째인 대설(大雪)이다. 대설은 이 시기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인데, 오늘은 겨울 같지 않게 따뜻하고 봄 날씨처럼 훈훈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실 24절기는 중국의 화북지방 상황을 반영해 붙여진 것으로 우리하고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꼭 이 시기에 적설량이 많다고는 볼 수 없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우리하고 약 15일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15일 후인 동지쯤 많은 눈이 내릴 것으로 보고 있다.
선곡리를 방문하러 가는 길 필자의 머리속은 근대역사의 한 장면이 떠올라 온다. 왜냐하면 선곡리는 1893년 보은 동학 운동하고 깊은 연관이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암행어사 어윤중은 보은 출신으로 탁지부 대신을 지냈던 분이며, 암행어사 시절인 1877년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지방행정을 조사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농민들의 참상 원인이 조세 수탈에 있음을 지적하고, 구체적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국왕과 대신들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또한 1893년 동학도들이 보은집회를 열고 교조신원(敎祖伸寃)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천명해 호서, 호남지방이 동요하자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로 파견된 인물이다. 당시 관료들이 동학도들을 탄압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어윤중은 처음으로 동학도를 ‘민당(民黨)’이라고 하여 그들의 요구에 동정을 표시하였다. 이로 인해 동학 농민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1894년 박정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 경제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조세제도의 개혁은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어윤중은 온건 개혁파 인물이지만 개인적 성품은 매우 강직하고 담대하였다. 고종과 민비의 작은 요청도 법률에 어긋난 것은 거절하였다. 일제 측도 300만 원의 차관을 일본 화폐로 주려고 제의했다가 은(銀)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던 인물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가다 보니 어느덧  개토시가 나온다. 
#마을 사람들 끼리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우물을 중요시 했던 공동체 정신이 강한 마을
개토시는 선곡리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기 시작 했다고 전해지는 고개이다. 개토시를 지나 독징이 못이 보인다. 지금의 선곡리는 선우실 또는 선곡이라 불렀는데, 선동리(仙東里), 사각리(四覺里), 황토리(黃土里)를 통폐합하여 선곡리(仙谷里)라 했다고 한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주민들 몇 분이 나와 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마을 이야기를 듣고자 방문 했다고 하니 올해 83세 되셨다고 하시는 분께서 “우리 마을은 한때 150가구가 넘었답니다.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요. 혹시 오시다가 마을 뒤에 있는 아래 샘을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하며 필자에게 물어 본다. “마을 뒤 작은 웅덩이는 보았는데요. 혹시 그것이 아래 샘인가요? 우물로 보기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던데요.” “네! 맞아요. 우물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지요? 그것이 아래 샘인데, 우리 마을은 윗 샘과 아래 샘이 있었지요. 지금은 윗 샘은 없고 아래 샘만 있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우물에 대해 궁금했는데요.” “그 우물은 우리 마을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생명수 같은 우물이랍니다. 우리 마을은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꽤 큰 마을이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물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우물이 클 수밖에 없었고요. 지금이야 저수지가 많이 조성되어 사시사철 농사 짓기 편하지만 7~80년 전만 해도 우리 마을은 천수답이 많았었답니다. 그러니 농사 짓기가 어려웠지요. 특히 선곡리는 물이 적다 보니 우물이 귀할 수 밖에 없었어요. 아래 샘이 큰 것은 그 물로 식수도 했고, 빨래, 김장 등 모든 일을 우물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농사일도 그 물로 했기에 우물을 깨끗이 관리할 수 밖에 없었어요. 심지어 마을에 초상이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우물 덮는 일을 했답니다.” “초상이 났는데 왜 우물을 덮나요?”하고 필자가 신기한 듯 여쭈어보니 “우물에 부정을 타면 마을에 액운이 올까 봐 어른들이 우물을 덮었다”고 하신다. 그 만큼 선곡리에서는 우물을 중요시 했다고 한다. “그러면 마을의 대소사를 우물에서 많이 상의 하고 했겠는데요?” “맞아요.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만나서 상의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 당연히 공동 우물에서 만나 회의를 했지요. 일부러 회의를 하자고 우물에서 만난 건 아니고 물 길러 올 때나 빨래를 하러 오면 자연히 마을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지요. 그러다 보면 마을 일을 상의 하게 되고 그렇게 살아 온거지요. 우리 마을은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한데요. 아마도 우물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선들이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지는 선곡리 마을은 역사적 기록이 적어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애향심 많은 마을 
선곡리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은 예부터 남달랐다는 소식을 필자도 들은바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공동 우물에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회관을 나와 마을을 둘러보는데 마을 입구에 있는 유래비 2개가 눈에 들어 온다. 마을 유래비를 살펴보니 산 높고 물 맑은 곳에 인심 좋은 이들이 머루 송이처럼 모여 살아 왔다. 숱한 애환이나 사연들이 많았지만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동민들의 뜻을 모아 전설과 사실에 의해 내력과 인물들을 간략하나마 기록해 둠으로 먼 훗날 후손들이 마을 역사를 참고하고 고향으로 하고 있는 이들의 진한 애향심이 깊이 깃들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비를 세운다라고 쓰여 있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선곡1리 마을회관
선곡리 아래샘
선곡리 임구 고목
선곡리 입구 소나무
선곡리 입구
어윤중 고가
최감찰댁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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