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1)
황무지(1)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12.14 09:23
  • 호수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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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 수
속리산면 거주
시인, 수필가
충북작가회의 회원

시를 구분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 길이가 있다. 어떤 이는 시는 짧아야 야무지고, 찰지고 여운이 남는다고 했다. 맞는 말이라 공감이 갔다. 시가 길어지고 있는 작금의 시단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짧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다른 측면에서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길이가 긴 시는 그 이유가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시인의 시대에도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을까 궁금하다. 시인의 작품이 워낙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어서 장시도 많은데, 그 동안 지면의 제약 때문에 다루지 못했다. 그 동안의 짧은 시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시인의 광대한 작품세계와 문학적 역량을 볼 수 있는 시를 만나보려 한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 보자. 

황무지에는 거칠은 풀잎이 함부로 엉클어졌다
번지면 손꾸락도 베인다는 풀,
그러나 이 땅에도
한때는 썩은 과일을 찾는 개미떼같이
촌민과 노라리꾼이 북적거렸다.
끊어진 산허리에,
금돌이 나고
끝없는 노름에 밤별이 해이고
노느매기 도야지 수없는 도야지
인간들은 인간들은 웃었다 함부로
웃었다
웃었다!
웃는 것은 우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의 몇 개의 장시 중에서도 가장 길기도 하고, 사연도 많은 작품이다. 전체는 6장 550행이다. 처음 잡지에는 3장, 4장까지 발표되었고, 그 말미에 다음 장의 완결을 예정해 놓았다. 그러나 정작 그 나머지는 세월을 건너뛰어  1994년에 육필 원고가 발견되고, 2003년에 세간에 발표되었다.

사람쳐놓고 원통하지 않은 놈이 어디 있느냐!
폐광이다
황무지 우거진 풀이여!
문명이 기후조와 같이 이곳을 들러 간 다음
너는 다시 원시의 면모를 돌이키었고
엉클은 풀 우거진 속에 이름조차 감추어 가며...
벌레 먹은 낙엽같이 동구에서 멀리하였다.    (1937년작 「황무지」 중 1장)

*노느매기: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는 일, 또는 그렇게 나누어진 몫

1930년대 식민지적 상황과 폐허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일제의 검열을 피해 습작하고 발표하였다. 당시 문예사조의 한 축인 퇴폐적 심미주의, 데카당스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당시 서구의 모더니즘 작가인 엘리엇의 동명의 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시인에게는 당시의 조국이 황무지였고, 자신을 포함한 식민지 피지배계급의 가난한 이웃들은 황무지에 간신히 뿌리내리려고 하는 가여운 생명이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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