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삼승면 서원리
(77) 삼승면 서원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11.23 09:35
  • 호수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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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중요시했던 우암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삼승면 서원리

#한서재 송시도 선생이 일경재 사숙을 세우고 후학들을 강학 했던 유서 깊은 서원리는 300년 수살대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는 마을
이번주는 삼승면 서원 2리(원 서원)를 소개하고자 한다. 
서원 2리는 원남리와 삼승 산업단지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보은읍 남쪽 8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일찍부터 탐방 준비를 하고 출발하는데 필자의 마음이 어느 때 보다 설레인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서원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궁금했기 때문에 오늘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들어서이다. 
1914년 지금의 서원 2리는 이동(梨洞)과 서니면(西尼面) 일부를 통합하여 서원리(西原里)라 했다는데, 자료로만 보면 서원(西原)이라는 이름을 추론하기가 어색하고 글과 의미가 맞지 않다는걸 알 수 있다. 
또 다른 자료에서 서원리는 현종(顯宗) 때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생 형제가 이곳에 살고 있었던 양씨, 이씨, 김씨(梁氏, 李氏, 金氏) 등 유생들을 강학했던 산앙사와 일경당 서원(일경재 사숙)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일경당 서원은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지금은 문헌상 기록만 남아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자료에는 서원(書院)이 있어 서원리(書院里)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문헌을 보면 서원리(書院里)가 옳을듯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마을 통폐합 당시 대부분 앞뒤 이름을 따서 한자씩 붙였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우리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간악한 의도가 있어 아무런 의미나 뜻도 없는 서원리(西原里)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을에 도착하니 수살대가 웅장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산앙사(山仰祠)와 일경재(一敬齋)가 있어 유학자들을 길러 내었던 서원리는 예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유명했던 마을
서원2리는 남쪽으로 가재 골이 있는데 가재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 뒤편 서쪽 방향으로 삼태미(삼태기)처럼 생긴 금적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해발 652m로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봉수대는 청산 박달라산에서 신호를 받아 회인 용산점으로 연락하던 곳이라고 한다. 수살대를 지나 마을 안길로 조금 더 들어가는데 길옆 비문 하나가 보인다. 비문에는 산앙사유지비(山仰祠遺址碑)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이곳이 산앙사가 있었던 자리인 듯하다. 비문에 우암 송선생(尤庵 宋先生), 수암 권선생(遂菴 權先生), 운곡 송선생(雲谷 宋先生)의 내력이 있고 그분들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던 자리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세분은 우암 송시열 선생과 수암 권상하선생, 운곡 송강석 선생인데, 운곡 송강석 선생은 우암 선생이 귀양 가셨을 때 귀양지에서 뒤 바라지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세한재 송시도 선생의 아들 송기억의 아들이라고 한다. 세한재 송시도(歲寒齋 宋時燾) 선생은 1672년 장성부사에 재직시 필암서원을 중건하여 학자들을 초빙하고 사민 교육을 했다고 전해 지는 대학자이며, 송시열 선생이 덕원에 유배되자 사직하고 선생의 시중을 들면서 세한재 유고(歲寒齋 遺稿)를 쓰신 분이다. 1680년 숙종6년 노론이 집권하자 송시도 선생은 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보은의 금적산 아래에 일경재 사숙(一敬齋 私塾)을 짓고 후진 교육에 전념하신 분으로 알려지고 있다. 운곡 송강석 (雲谷 宋康錫)선생 또한 말년에 구병산 만학곡에 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세분의 선생을 기리는 후학들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산앙사(山仰祠)를 짓고 추모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비석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집 집마다 김장을 하는지 분주히 오고 간다. 

#수년 전까지 동제를 지내기도 하던 서원리는 예를 중요시 했던 송 우암 선생의 숨결이 있는 마을답게 동제를 주관하는 12제관을 엄격하게 선발했던 서원리 마을 
회관 앞 작은 텃밭에서 주민 한 분이 배추를 다듬고 있다. 마을 이야기를 부탁드리니 회관에 어르신들이 계시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회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점심 준비를 하시는 분들과 파를 다듬고 계신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어서 오세요. 우리 마을은 주민들이 점심을 함께 하기 때문에 김치를 많이 담가야 해요.” 올해 69세 되었다고 소개를 하신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마을은 자랑할게 없는데,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가요?”하며 어르신들이 계신 방문을 열어주신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우리 마을은 소나무 수살대가 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이랍니다.” “수살대요? 여기에 수살대가 있나요?” 필자가 궁금해 하니 마을 입구에 있는 소나무를 수살대라고 부른다고 하신다. 
수살대는 마을의 병마나 환란을 막아주는 수호신 같은 것으로 나무나 돌 등을 세워놓는 것인데, 보통 둥구나무 또는 솟대로 부르며 느티나무, 팽나무, 물푸레나무, 버드나무 등을 수살막이로 삼기도 한다. 
“예전 우리 마을은 매년 1월 보름 전에 수살대, 배나무골 산제당, 팽나무골 산제당, 산앙재에서 향제(동제)를 지냈답니다. 동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지요, 옛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동제를 주관할 12제관을 선정하는데 사주를 보고 액운이 없는 사람 중에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향제(동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자손이 없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 아들딸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지는 아들딸 바위가 마을 뒤 산에 있어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마을
마을 뒤 산 중턱에 아들딸 바위가 있어 자손이 없는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돌을 던지기도 했답니다. 회관 앞에서 만난 주민도 아들딸 바위에서 돌을 던져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금적산에는 아들딸 바위뿐만 아니라 병풍바위, 드러업친(2개 겹친) 바위가 있고, 마을 옆 안터골 가는 곳에 소류지가 있는데 소류지를 조성할 때 밀가루로 임금을 받았다고 하신다.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데, 마을 유래비가 눈에 들어 온다. 고려 공민왕이 관기리에 머물 때 금적산을 가리켜 삼태기 같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 길주중에 길지라는 말을 했다고 쓰여 있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마을 뒤 금적산
마을입구와 수살대
마을전경
마을전경
산앙사유지비
서원 못
서원2리 마을회관
수살대
안터골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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