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탐방 … (76)삼승면 원남리
우리마을 탐방 … (76)삼승면 원남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11.16 09:51
  • 호수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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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적산 아래 명당에 자리잡은 워내미

고려 공민왕이 복주(지금의 안동) 파천 후 잠시 머물렀던 워내미(원남)는 사과 생산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마을이다. 원남리는 토질과 기후가 사과 생산의 최적지로 꼽히고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사과만을 선호하는 매니아 층이 형성될 정도라고 한다. 
지역 역사에 대한 학술발표회와 조선 시대 보은 유학의 흐름과 함께 지역 내 내려오는 보은문화를 소개하는 조선 시대 낙향 선비가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을 집필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보은마을 소개를 몇 개월 미루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보은의 전통과 문화 유적 유물들을 소개하며 마을의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이번주는 원남역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워내미(원남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워내미(원남리)는 지금의 삼승면 원남리를 말하는데, 일제의 토지 수탈 과정에 일어났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송촌(松村), 월촌(越村), 상원암(上元岩), 온야리(溫夜里) 등을 합쳐 지금의 원남리가 되었습니다. 
원남을 찾아가는 길은 200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던 삼승 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있고,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공룡(곤포 사일러지) 알이라 불리는 하얀 짚 덩이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기도 하네요. 며칠 전 모심기가 끝난듯하더니 벌써 추수가 끝나고 입동(立冬)이 지났습니다. 
원남리는 조선 시대 역이 있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는 마을이랍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지금의 안동)로 파천을 갔다 돌아 올 때 속리산에 잠시 들렀는데, 마침 큰 비가 와 원남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합니다. 이때 원남의 노인들이 칠연시를 지어 올렸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서문을 썼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원남 역은 청주 율봉역 찰방 소속이었고 대마(大馬)1필, 기마(騎馬)30명과 종 15명이 있을 정도로 큰 역참(驛站)이었다고 합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원남리는 지금도 칠로연집시(七老讌集詩)가 전해질 정도로 인문학이 발달된 마을
삼승면 원남리는 면 소재지를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사과 마을로도 유명하답니다. 원남리 주변은 사과 과수원이 유달리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따뜻한 날씨와 황토로 이루어진 지질로 사과 생산의 적지이기 때문이랍니다. 
사과의 특성상 일조량이 많으면서 밤낮의 기온 차가 높아야 되며, 통풍이 좋아야 하는데, 전국에서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이 몇 않는데, 바로 원남리가 이런 조건을 갖춘 최적의 지역이랍니다. 
특히 원남리는 마을 주변에 오염원이 없어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으며 마을 뒤 금적산이 두르고 있어 일 년 내내 원활한 물관리가 가능한 마을입니다. 
상원암을 가기 위해 법화사 쪽으로 걸어가니 산 위쪽으로 왕릉처럼 생긴 언덕이 보인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니 마을 주민이 궁금한 듯 다가와 물어 본다. 
“무엇이 보이나요?” “저기 앞에 있는 산언덕이 왕릉처럼 보여서요.”하고 말하니 빙그레 웃으시며 “그냥 언덕이겠지요. 여기에 무슨 왕릉이 있겠어요.”하며 지나가신다. “그렇군요”하며 돌아서려 하니 “그러지 말고 우암 송시열 선생의 동생인 송시도 선생의 묘비가 있으니 그곳을 가보라”며 가르쳐 주신다. 
주민이 알려 주는 대로 찾아가니 길옆 작은 비문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비문을 살펴보니 우암송선생사형제거로유허비(尤庵宋先生四兄弟居盧遺墟碑)라고 쓰여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송시도 선생은 원남에서 일경당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을 길러 내셨다는 기록을 오래전에 본 적이 있어 평소에 그분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뜻밖에 이곳에서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쁜 마음이 들었고, 한편으로 한 때 송자라고 추앙 받던 송시열 선생의 아우가 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배출한 부분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원남리는 마을 깊은 곳에 옛 풍경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특화된 사과 생산으로 주민소득이 높은 마을
우암송선생사형제거로유허비(尤庵宋先生四兄弟居盧遺墟碑)를 지나 산 쪽으로 들어가니 우암 송시열 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개천 사천0백이십일년(開天 四千0百二十日年)에 은진송씨(恩津宋氏) 종중에서 세워 놓은 건립비가 있는데, 은진송씨 형제들이 어머니 상을 당하여 장례를 모실 때 조문객을 받던 자리에 세운 비라고 쓰여 있다. 우암 선생의 유허비를 지나 샛골로 들어서니 꾸불꾸불 작은 언덕길이 나온다. 아직도 옛 모습이 그대로 있는 것이 전형적인 시골길을 보여준다. 
늦가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직은 조금씩 남아 있는 단풍들과 마을 안길 가장자리에 애처롭게 피어 있는 꽃들이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듯 애처로운 모습을 보인다. 
깨끗한 마을길을 따라 이리저리 가을 풍경에 젖어 있는데, 담장 넘어 흰둥이가 낯 설은 이의 방문이 반갑지 않은지 연신 큰소리로 짖어 댄다. 그래 너도 어느 집 가족의 일원이니 놀고먹을 수만은 없겠다. 세상은 역할 없이 태어난 것은 없으니 너의 역할이 집 지키는 일이라면 너의 직분에 충실해라하며 자리를 떠나 원남리 수호 나무가 있는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원남리 수호 나무는 재래시장 옆 버드나무로 둘레가 크고 수령이 230년이 된 나무라고 한다.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어디선가 구수한 노래 소리가 들린다. 
爲愛黃花晩節香 위애황화만절향
輿杯相屬意深長 여배상속의심장
安危苦樂循環事 안위고락순환사
設輿兒孫戒復霜 설여아손계복상
국화꽃 철늦게 향기로운 것 사랑하노니
잔 들어 서로 권하니 뜻 또한 깊었네
안위나 고락은 돌고 도는 것
아이에게 말하노니 서리 밟 듯 조심하라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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