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절반
하루의 절반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10.12 10:06
  • 호수 7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럼니스트 최 생 호
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보은읍 강산리

문을 열고 나서면 풋풋한 새벽 향이 물씬, 온몸을 깨운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갈 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민다. 스치는 바람이 박하향처럼 상쾌하다.
동네를 가로질러 둑길을 달린다. 부지런한 농부의 손과 발은 벌써 분주하다. 작물이 사람을 깨우는지 사람이 작물을 눈뜨게 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이른 새벽, 둘의 만남은 약속된 믿음이다. 서로가 무언의 의지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의식처럼 마주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의 풍광이 경이롭다. 세상에 온전히 잠드는 건 없다. 어제 본 풀과 돌과 나무가 오늘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익어가는 벼 이삭과 파릇한 배춧잎도 하루하루 다르다. 보는 듯하면서도 다 보지 못하는 건 단순히 속도와 생각의 차이 때문일까.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담을 순 없다. 보이는 것도 다 보지 못해 자주 핀잔을 듣는다. 날마다 같은 길을 가도 늘 새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설렘은 낯섦으로부터 다가온다.     
낮게 깔린 구름과 물안개도 풍경에 신비를 더 해준다. 어스름의 배경엔 솟아나는 무언의 외침들이 스며 있다. 그렇게 무안의 세계를 달린다. 자연은 말한다. 지금 보이는 것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심호흡을 하면 들어오는 건 공기만이 아니다. 하루를 살아 낼 에너지가 충전된다. 막혀 있던 생각에 활로가 생긴다. 뭐든 해 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샘솟는다. 다리에 힘이 붙고 콧노래가 절로 난다. 
느리지만 걷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어르신께 자전거의 속도가 무례하지 않도록 페달을 멈추고 목례를 한다. 오랜 시간 이 길 위에서 뵐 수 있기를 소망하며 잠시 먹먹한 마음을 추스른다. 앞서거니 뒤서 거니 분주한 중년 부부는 늘 일정한 간격이다. 한 방향으로 함께 걸으면서도 말이 없다. 관성이 작용하는 듯 그 거리는 늘 한결같다. 그렇게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며 살아온 듯하다. 서로 의지하며 한 길을 가는 관계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견고하게 유지된다.     
마라토너처럼 쉼 없이 내달리는 건각의 뒤엔 혀를 길게 늘어뜨린 견공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흘끗흘끗 쳐다보며 달린다. 앞서가고 싶어도 쫓아가야만 하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은 듯하다. 한 번도 앞서가지 못한 게 아니라 뒤에서 몰고 간다 생각하라 말해주고 싶었다. 앞서간다고 다 잘난 것도 아니고 먼저 갔다고 다 얻은 것도 아님을 달리다 멈춰보니 알겠다. 
들판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아침을 맞는다. 벌써 밭일을 마치고 호미와 삽을 정리하는 분들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하다. 정갈하게 가꿔 놓은 밭이랑과 다양하면서도 질서 있는 작물들의 모습은 아침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성실한 농부의 얼굴이다. 출근하면서도 적지 않은 논과 밭을 빈틈없이 일구는 마을 형님네의 비결도 아침 노동이다. 자전거를 멈춰 세워 인사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손놀림이 빠르다. 호흡이 척척 맞는 장단을 멈추게 할 수 없어 그냥 지나칠 때도 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정한 코스를 돌아오면 커피 한 잔을 위해 방앗간처럼 들르는 곳이 있다.  크지 않은 규모의 밭에 맞춤한 수량의 대추나무를 제대로 키우고 있는 곳이다. 가장 이상적인 노동 시간과 노동력 투입, 효율적 관리 방법을 결합하여 최고의 생산성을 올리는 선진 농장이다. 이 분의 아침은 마을에서 가장 일찍 시작된다. 함께 달린 자전거는 벌써 한편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벌써 대추밭을 한 바퀴 돌고 나무와도 대화를 마쳤다. 잎사귀와 열매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세밀하게 살핀다. 손에는 이상 신호를 보내는 나무껍질과 잎과 대추가 들려 있다. 관찰하고 기록하며, 질문하고 답을 찾는 농부의 전형이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커피 한 잔으로 나누는 농부의 대화는 대추나무, 포도나무, 다래 덩굴과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함께 듣는다. 아직 어설픈 농부는 아침마다 배운다. 농촌에서의 아침은 하루의 절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