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공산성, 백제의 유산 향기 켜켜이 스며 있어
황성옛터 공산성, 백제의 유산 향기 켜켜이 스며 있어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3.09.21 10:35
  • 호수 7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안의 산재된 수많은 유적지 살아있는 중요한 역사 교과서

보은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으로 후삼국시대에도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 때문인지 군내 산성군은 14개에 달한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을 이루고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와 고려와의 경계를 마주했다. 이같은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우리지역의 산성이 다른 어느 지역의 산성보다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은 수많은 전쟁으로 부터 지역을 지킨 역사적인 산물이다. 보은문화원이 2002년에 펴낸 ‘보은의 성곽’편에 나온 성곽을 보면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는 성은 삼년산성 외에도 노고산성, 문암산성, 백현산성, 태봉산성, 관기산성, 매곡산성, 주성산성, 호점산성, 국사봉산성, 노성산성, 동학대도소 상터, 벙어리산성, 다라니보루가 있다. 이렇게 많은 산성 자원이 있지만 국가사적지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삼년산성 외에 나머지 산성에 대해서는 발굴이나 복원 등의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타 지역은 어떨까? 본보는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타 지역 성의 관리실태 및 이용사례 등을 취재해 우리고장 산성문화재도 지역주민들이 쉽게 접하고 지역사를 공유하는 역사교육의 장이 되고, 특히 지방소멸 시대 산성을 관광자원으로 활용,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보도순서>
■ 우리지역 산성문화재의 실제(삼년산성, 호점산성)
■ 관광상품으로 활용하는 타 지역 산성문화재
  - 단양 온달산성 온달관광지로 
 ▶ 공주 공산성, 백제고도의 중심
  - 대전 계족산성, 황톳길 더해져 유명세
  - 독산성, 세계문화유산 추진
■ 삼년산성·호점산성의 관광상품화 방안

공주시 공산성은 대낮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고즈넉하고 은은한 야경이 특히 일품이다.
유려한 성의 곡선을 따라 비추는 불빛과 버선코처럼 처마가 들린 누각, 그리고 사각형의 돌로 차곡차곡 쌓은 성곽의 모습은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게 할 정도로 눈길을 빼앗아 버린다.
공주의 옛 이름 고마나루는 한자로 웅진(熊津)이다. 웅진은 백제의 도읍 한성, 즉 지금의 서울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면서 새로운 도읍이 된 곳으로 웅진 도읍기 백제의 왕성(王城)은 웅진성이며 지금의 공산성이다.
2015년 7월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 등재는 그 것만으로도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큰 힘이 된다. 삼년산성도 충북의 산성군에 포함 잠정목록이다. 국내 최고성, 난공불락, 삼년산성과 관련한 야사 남매의 이야기 등 탄탄한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삼년산성은 온전히 유네스코에 등재되지 못하고 있다. 초기 산성을 복원하면서 고증되지 않은 방법과 돌을 사용한 것은 두고두고 비난을 받고 있다.
삼년산성은 성곽 위가 돌이거나 흙으로 돼 있어 성곽이 무너질 위험이 높아 성곽 위로 올라가지 못하지만 공산성은 성곽 위를 포장해놓듯 시멘트 콘크리트로 발라서 탐방로 대부분이 성곽 위로 조성돼 있다.

 

■백제ㆍ통일신라ㆍ조선시대까지 유적볼 수 있는 역사기행터

지난해 31만5천여명의 관광객이 찾은 공산성(사적 제12호)은 북쪽에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급경사를 이루는 공산(公山)의 산세를 활용해 축조된 천연의 요새다.
전체 성곽길이는 2.66㎞. 1.68㎞인 삼년산성보다 1㎞정도 더 길다. 대부분 석성으로 축조됐지만 동쪽구간 735m는 토성이다. 고운 흙과 모래흙을 번갈아 다져서 쌓는 판축기법을 주로 사용했다.
석성은 골짜기 쪽은 내외벽 모두 돌을 쌓아 만들고 경사면은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외벽의 돌과 맞물리도록 돌을 쌓은 것인데 현재 대부분의 성벽은 조선시대 이후에 고쳐 쌓은 것이라고 한다.
삼년산성은 성안에 삼년산 서원이 있었다는 문헌의 기록이 있지만 정확하게 위치 등이 확인되지 않고 1902년 조성한 보은사가 있는 것이 전부여서 볼거리는 성벽과 문지, 치성 등에 그치는 삼년산성과 달리 공산성은 왕궁지를 비롯해 많은 건물지와 누각이 남아있어 탐방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산성 성벽 동서남북에는 깃발이 꽂혀있는데 깃발의 문양은 송산리고분군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깃발의 테두리와 깃발의 그림으로 방향을 구분할 수 있다. 각 문루마다 동청룡(東靑龍), 서백호(西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의 그림이 그려진 깃발이 있다. 
성의 주 출입구는 금서루 주변에는 백호의 깃발이 날린다. 이곳엔 문이 두 개 있는데 아래쪽은 마차가 드나드는 곳이고 위쪽이 사람이 통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으로 들어서 성곽길을 따라 시계방향(남쪽)으로 돌면 먼저 만나는 것이 쌍수정(雙樹亭)앞 평탄지이다.
백제왕궁 추정지인데 1980년부터 대대적인 발굴조사시 처마끝을 장식한 수막새, 청동거울, 금동제 향합, 토지 등이 발굴됐다고 한다. 연꽃무늬 수막새의 존재를 통해 품격이 높은 건물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벽주건물지(도랑을 파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후 점토로 벽을 발라서 만든 건물지)와 굴립주 건물지(기둥의 밑동을 땅속에 박아 세운 건물지)를 비롯해 성벽, 연못, 나무창고와 같은 저장구덩이 등도 확인됐다.
공산성에서는 쌍수정 앞 왕궁터 유물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다양한 유적이 발굴 조사로 확인됐다. 토기, 기와, 장식 칼, 큰 칼, 중국제 자기, 무기, 목기, 쌀, 밥, 조개, 말갑옷, 옻칠갑옷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옻칠 갑옷은 645년 의자왕 5년에 만든 명문이 확인됐다고 한다.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두껍게 옻칠을 한 갑옷에서 貞觀十九年(정관 십구년)으로 명문이 새겨진 것이 확인돼 발굴 당시 크게 주목을 끌었다.
성의 남문은 진남루(鎭南樓)는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고 토성이었던 것을 석축성으로 고치며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가하면 공산성 안에는 12각으로 지은 둥근 2채의 건물터가 있다고 한다. 발굴시 출토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 8~9세기경에 사용된 것들이다. 12각 건물들은 대개 가뭄이 심할 때나 전염병이 돌거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고 생각했는데 12각의 둥근 건물은 바로 하늘을 상징하는 셈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공주에는 9주 가운데 하나인 옹천주가 설치됐는데 이때 만들어진 관청건물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28칸 규모의 건물터도 발굴됐다.
백제 동성왕 22년(550년)에 지은 누각으로 왕과 신하들이 연회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임류각(臨流閣)도 있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과정에서 고층 누각 모습이 확인됐고 현재의 누각은 1993년 다시 세운 것이다.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동쪽 문루가 영동루(迎東樓)다. 1980년 발굴당시 문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탱하고있던 받침돌을 확인했는데 현재의 성문은 철종 10년인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 세운 것이다. 이름은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영동루로 지었다고 한다.
공산성 안에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누각인 광복루(光復樓)는 8ㆍ15광복 이후 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고 했다고 한다. 원래는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이라 불렀는데 1946년 백범 김구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기 위해 고쳐 불렀다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금강과 접해 있는 만하루(挽河樓) 뒤로 연지(蓮地)도 있다. 연지는 백제시대에는 사찰 영은사 앞쪽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여지도서에는 공산성에 물이 부족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어 금강물을 끌어다 썼다고 한다. 이곳에는 성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해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암문도 있다.
공산성 안에는 얼음창고로 사용했던 곳도 있다. 한겨울 금강물이 꽁꽁 얼면 그것을 깨어 왕겨에 싸서 석빙고에 저장해뒀다가 더운 여름 꺼내 썼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한약재를 보관하거나 얼음저장 창고로 사용했다가 누에의 알을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해주는 잠종창고로도 사용됐었다고 한다. 현재 안내판은 잠종창고로 돼 있다.
공산성의 북문이고 가장 낮은 곳에 자리 잡은 문루가 공북루(拱北樓)다.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길이다. 원래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선조 36년인 1603년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던 망북루 자리에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月波堂)을 지었다고 한다. 월파당은 1954년 철거됐다고 한다.
넓은 평지로 돼 있는 공북루 안쪽에는 넓은 평탄지가 있는데 백제가 멸망한 뒤 자연스럽게 마을이 조성됐고 성안마을이라 불렸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1997년까지 유지되었는데 문화재 발굴 및 관광지 개발로 사라졌다.
이곳에 대한 수차례 발굴 조사로 주거지, 건물지, 우물지, 공방지 등이 확인돼 백제, 신라, 조선시대까지 일반인들이 거주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성안마을은 일제강점기 성내의 중군영(中軍營)을 폐지한 후 거주민이 크게 늘어 한때 300여호의 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성안마을의 토지를 공주의 한 갑부가 구입해 군영자리에 커다란 쌀 창고를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시장이 열리자 쌀 창고에서 시내로 쌀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길이 바로 서문고개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공산성의 전망대 공산정은 공북루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만날 수 있다. 사방팔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인데 이에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18세기 후반의 충청도읍지 공주목 지도를 보면 후락정(後樂亭)이 표기된 곳에 1970년대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유신각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렸는데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공산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마가편으로 훑은 공산성 일주 코스다. 역사교과서의 한 권은 너끈하게 채울 정도의 내용들이 산성 현장에 펼쳐져 있다.

 

■밤의 공산성 진가 발휘
백제고도인 공주는 공산성과 무령왕릉, 공주박물관, 공주한옥마을, 그리고 산성동 봉황동 등 구도심이 하나의 관광라인으로 연결돼 있다.
시적지 공산성이 지금의 관광명소 공산성으로 발전한 것은 잡목제거와 야간 조명이다. 그 전에는 잡목이 우거져 동네사람이나 역사학자, 대학생 등의 방문지에 불과했다.
특히 민선 4, 5기 공주시장을 지낸 이준원 시장이 추진한 공산성 정비 및 관광자원 개발이큰성과를 보였다. 사적지관리팀의 이예준 팀장은 “수십년 된 잡목에 휩싸여 성곽 자체를 볼 수 없어 말이 공산성이지 관광객은 잡목만 보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며 “그런 공산성의 잡목을 제거하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지만 어쨌든 잡목 제거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아름다운 성곽 모양을 시민들은 물론 관광객에게 선보이게 됐다”고 말했다. 2001년 시작된 공산성 경관조명 설치사업은 2019년 마무리 됐다. 이 팀장은 “공산성 경관 조명은 구도심과 신도심을 연결하는 금강철교 경관 조명과 어우러진 빛의 경관을 만들면서 공주시 야간 시간대의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시대를 반영한 관광자원으로서의 개발 뿐만 아니라 축제와 행사 등 다양한 이벤트로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중 유네스코 등재 이후 매년 개최하고 있는 세계유산축전이 눈길을 끈다. 부여와 익산도 자체적으로 관련축전을 여는데 공주시는 백제문화제를 열어 공주시가 백제고도의 중심지임을 홍보하고 있다.
백제병사로 분장한 이들이 말을 타고 기마 퍼레이드 열리고 행사장인 금강 내 미르섬에는 백제마을(고마촌)을 조성해 1천500년전의 백제를 재현한다.
행사장 부스는 초가이고 체험은 백제토기와 도자기 만들기, 백제 복식체험, 백제 활 및 석국 만들기 등 백제를 주제로 한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석장리 박물관과 연계한 구석기 동물농장을 운영하고 공산성에서는 수문교대식 이벤트도 개최하고 공산성 안에서는 백제활쏘기 및 백제기악 탈그리기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1천500년전 백제시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한다.
이밖에 성안에서 달밤 이야기와 콘서트라는 행사도 개최해 밤에도 아름다운 공산성을 알리고 있다. 공산성과 무령왕릉과 왕릉원, 한옥마을, 국립공주박물관, 고마나루 솔밭 구간을 오가는 고마열차도 보는 재미를 준다.
공산성에서 받은 인상은 왕성이라는 차별성과 함께 유구한 역사문화유적, 그리고 야간에서 관광의 답을 찾은 것. 이중 야간 관광은 열악한 관광여건의 활성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관광유발효과를 크게 높인 공산성 성곽 주변 잡목제거와 경관조명 설치사업은 잠자고 있는 삼년산성을 관광자원으로 깨우기 위해 1차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으로 보인다.
송진선ㆍ김경순 sun@boeunpeopl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금서루. 이곳은 마차 등이 드나들었
던 것으로 보이는 출입구이다. 문 천정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응ㄹ 바탕으로 
금서루
주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금서루 앞. 성안으로 진입하는 길. 구불구불하다.
왕궁유적지
잠종냉장고,옛날 양잠 씨앗을 보관했던 곳이다.
성곽길이 2.66㎞ 중 735미터가 토성이다. 제초 및 성곽도 무너지지 않도록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산성은 북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다. 이 다리는 금강철교다. 밤이면 색색의 조명이 불을 밝히며 성곽의 실루엣을 감상할 수 있는 공산성과 한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백제의 번성과 국력을 신장시킨 무령왕 동상이다. 공산성 금서루 앞 로타리에 서있다. 
두개의 문 사이로 무령왕동상과 멀리ㅏ 공산성 금서루의 모습이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