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분노하는가?
왜 분노하는가?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9.07 09:29
  • 호수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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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 생 호
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보은읍 강산리

어느덧 아침 공기가 선선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연의 섭리가 애처롭고 경이롭다. 자연은 늘 솔직하다. 풀이나 작물에 이슬이 맺히는 백로가 내일이다. 본격적인 가을의 시작이지만 풍성한 결실의 기쁨을 맞이해야 할 농부들의 마음은 이상기후로 인한 변수 앞에 뒤숭숭하다. 잘 됐다고 웃을 수도 없고 잘못됐다며 마냥 하소연할 곳도 없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은 체념을 넘어 극복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자연과 사람의 관계는 순응과 순환으로 이어진다. 말이 없는 질서 속에 약속된 일들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다.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태도와 다시 시작하는 마음의 다짐이 차분하고 겸손해진다. 하늘과 땅, 흙과 물과 바람 앞에 사람의 역할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가을 건너 겨울이다.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함께 가는 순리를 거스른다. 막무가내로 증오하고 분열하며 혐오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말은 무책임하고 공허하다.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진짜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억울한 죽음 앞에 조롱이 난무하고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히려 옹호하는 목소리만 커진다. 문제의 본질을 뒤엎고 호도하며 생명을 영달의 도구로 내세운다. 사람이 아니다. 인면수심의 표본들이 넘쳐난다. 자연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기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이유가 된다. 저항하지 않고 움츠리고 순응하면 자연은 되돌려 주지만 사람은 짓밟는다.
백 년의 미래를 좌우할 큰 계획인 교육은 처음부터 없었다. 아무런 철학도 계획도 없이 모래성 위에 세워진 허상뿐인 미래가 어찌 제대로 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까. 잘못됐으면 과감하게 바닥부터 파헤치고 다시 세워야 하나 교육마저도 이념과 정쟁, 갈등과 경쟁, 사리사욕의 최전선에 내 던져졌을 뿐이다. 
짓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현실에서 모든 친구와 이웃은 치열한 경쟁의 도구요, 대상일 뿐이다. 누군가를 누르지 않으면 내가 눌리는 교육 현장에서 부모라는 이름의 허울만으로 위세를 떨치는 학부모의 횡포에, 현실과 맞지 않는 어그러진 제도의 사슬 앞에, 출세에 눈먼 교육자들의 처세에 모두가 가위눌린 듯 힘겹고 두렵다. 가르침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간 선생님들, 평생 스승의 길을 올곧게 지켜가다 야만적 이기심과 어긋난 제도의 칼춤에 무너져 버린 선생님의 죽음 앞에 나약한 소시민의 애도는 공허하고 무력할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모두를 똑같은 잣대로 줄을 세우고 순위를 매기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은 야만의 다른 이름이다.
순리대로 돌아가야 하는 세상마저 거꾸로 치닫고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혼돈의 사회를 바로 세우고 곳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낮고 어둡고 그늘진 곳에 맨 먼저 손 내밀며 다가가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지도자의 길이라 했다. 맹목적 추종자들 앞에서만 허공에 어퍼컷을 날리며 목청 높여 대다수 국민들을 겁박하고 편 가르기 하는 대통령의 폭주가 위태롭고 가혹하다. 
노골적으로 역사를 왜곡, 부정하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버젓이 욱일기를 내건 채 우리 영해를 들어오고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바다에 핵 오염수를 퍼붓는 만행에는 입도 뻥끗하지 못한다.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와 목소리를 내는 대다수 국민들을 향해선 공산 전체주의 세력이요 기회주의적 추종세력이며 반국가 세력이라 부른다. 반일감정을 선동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다며 날선 혐오와 증오의 말을 쏟아낸다. 독립운동마저 이념논쟁으로 본질을 흐려 친일파들과 일본에 면죄부를 주려 발버둥 친다. 어느 적 이념 타령인가. 여순사건의 복판에서 태어나고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생생한 경험담을 들으며 자랐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디서도 공산당원이나 빨갱이는 마주하지 못했다. 오히려 오래전 대선 승리를 위해 공산당 일당독재 북한에게 판문점 총격 시위를 요청했던 그들의 정체가 다시 궁금해진다. 
그냥 살아도 버거운 세상살이다. 자연이 만물의 공생을 위해 몸부림치듯, 사람 사는 세상도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 주변의 억울함에 눈 돌리며 외면하고, 사회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작 나와 가족이 험난한 세상의 한복판에 내팽개쳐졌을 땐 모두가 침묵하고 누구도 나서주지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억울하며, 아프고 무너져 내리는 모두가 자신이고 가족이며 부둥켜안아야 할 이웃이다. 그래서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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