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귀뚜라미
  • 김경순
  • 승인 2023.08.24 09:28
  • 호수 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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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 철 순
시인
마로면 관기약국

귀뚜라미가
확 펼쳐졌던 여름을
반으로 접어서
박고 있습니다

뚜르르르르르르르르르

밤이 깊도록
재봉틀 소리가 납니다

여름의 길이가
꽤 길었나 봅니다

이제 곧
귀뚜라미의 바느질이 끝나면
여름이 접히고
가을이 오겠지요

                     - 「귀뚜라미」 전문 -

열대야에 뒤척이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올해 들어 처음 들어 본 귀뚜라미 울음소리. 입추 지나고 처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무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그 틈을 비집고 가을이, 가을이 오고 있었나 보다. 
무더운, 무더운 여름이었다. 올해는 도대체 여름의 끝이 보이지 않는 거 같다. 밤에도 열대야가 계속되어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는 바람에 여름 감기 환자가 겨울 못지않게 많다.
500포기 심은 고추를 따면서 얼마나 힘이 들던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싶다가도, 몇 십 배나 많은 고추를 심어서 날마다 고추를 딴다는 분을 생각하니 겨우 고추 두 번 딴 걸 가지고 무슨 엄살이지 싶다.
우리아버지는 힘든 농사일을 절대 자식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어도 호미 한번 잡아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남편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무슨 일이든 벌여놓고 본다. 혼자서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고추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며칠 전에는 김장배추를 심었다. 절임배추하면 좋을 텐데 막무가내로 배추를 심는다. 그 고집을 당할 수가 없다. 
약국에 오는 분들마다 이런 무더위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옛날에는 나무 그늘에만 앉아있어도 시원했는데, 이제는 나무 그늘도 소용없다고.
세상은 변하고 나무 그늘 대신, 부채 대신, 선풍기나 에어컨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낭만이 사라진 불행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귀뚜라미 울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가을이 오고 있다고, 조금만 더위를 참으라고, 그 옛날 그 목소리로 울고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변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게 사람이든 짐승이든 곤충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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