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수한면 거현2리 아래 문티마을 느티나무
(81) 수한면 거현2리 아래 문티마을 느티나무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3.08.10 09:40
  • 호수 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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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나무위에 널빤지를 얹어놓고 마루처럼해서 놀았어”

수한면 거현2리(418번지) 아래 문티마을에 있는 둥구나무인 느티나무는 1982년 지정된 보은군 보호수(10호)다.

마을언덕배기에 있는 느티나무의 나이는 480년이다. 동네 주민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아 500년은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키는 22미터, 둘레는 5.7미터에 달한다. 덩치가 얼마나 큰지 두 팔 벌려 안아도 성인 대여섯 사람이 안아야 잡힐 정도다. 느티나무가 펼쳐놓은 울울창창한 그 세력으로 인해 마을에서 살고 오갔던 사람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기고 있다.
문티재로 연결되는 국도가 지금처럼 나지 않았을 때는 아래 문티마을 느티나무 있는 곳으로 소로가 나 있었다. 보은사람들이 옥천 안내장을 보러가고, 안내사람들이 보은장을 다닐 때 마을 둥구나무 옆으로 난 길을 오갔다. 지금의 신작로보다 질러가는 길이어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이 길을 오갔다. 차편이 귀해 걸어 다니는 사람 천지였던 옛날, 거현2리 느티나무를 스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있다면 거현2리 느티나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보통 마을의 둥구나무인 느티나무는 마을 어귀나 마을 첫머리, 중간, 평평한 곳에 있으나 거현2리 느티나무는 언덕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주변은 넓지 않지만 큰 바위가 놓여있어 쉬기에 충분하다.
길손들이 지나며 여름철 흐르는 땀을 닦고, 사람을 품었던 그늘 넓은 느티나무 아래서 나그네들이 먼길 걷느라 힘들었던 다리를 편히 쉬게 했던 곳이다.
어디 길손뿐인가 이 동네에 사는 주민들, 특히 어린이들, 청소년, 청년들에겐 이 느티나무가 놀이터였다. 느티나무는 큰 덩치의 밑동을 치고 올라가 크면서 여러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뻗었는데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나이 어린 애들이 올라가 놀던 놀이터였다. 나무판자를 올려도 될 만큼 평평해 놀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어린이들은 학교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을 던져놓고 나무 위에 올라가 해가 넘어가도록 놀았다. 어두워도 집에 돌아올 생각없이 놀던 자식들을 찾아나선 부모들이 “영식아 얼른 내려와 저녁먹어야지”라고 보채도 금방 내려오지 않고 한동안 놀이에 빠졌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놀지 못했을 때는 나무 그늘에서 노느라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공기놀이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구슬 따먹기도 했다.
굵은 새끼줄 여러타래를 꽈서 만든 줄을 느티나무에 매단 그네는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해 타는 인기 놀이시설이었다. 
컴퓨터가 없고 핸드폰이 없고 텔레비전은 대중화되지 않았고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세상과 통하는 창구였던 당시 마을 느티나무는 이렇게 어린이들에게는 없으면 안되는 놀이터였다.
느티나무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너무 더워 들에서 일하기 어려웠던 점심나절엔 느티나무 아래 누워 솔솔부는 바람을 느끼며 낮잠을 즐겼다. 하루종일 불을 땐 것처럼 집안을 데운 열기는 밤이 늦도록 가시지 않아서 이집 저집 느티나무 밑에 멍석을 깔고 누워 이야기 나누며 여름날 더운 열기를 함께 견디기도 했다.
복날에는 큰 가마솥 안에 닭 여러 마리를 넣고 푹 고아 백숙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이 다 같이 먹으며 보양을 하고 놀았던 곳이다.
이렇게 주민들에게 많은 추억을 갖게 한 느티나무가 아직 그대로일까? 봄에는 이곳에서 살다가 중학교 때 도시로 나갔던 50대 출향인이 “어린 시절 느티나무 밑에서 재미있게 놀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며 고향의 느티나무가 보고싶어서, 일부러 왔다”고 할 정도로 거현2리 주민들에게 느티나무는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마을의 상징이다.
느티나무 바로 아래에 사는 김봉례(83) 어르신은 “느티나무 앞쪽에 여러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있었어. 후에 느티나무 위쪽 밭을 가꾸면서 너럭바위를 축대로 썼는지 안보여. 아깝지. 그리고 느티나무 옆으로 계곡이 흐르지? 여름철엔 시원해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이곳에 김치를 담가놓고 해 먹었고. 물도 많고 시원해서 동네 아낙들은 빨래도 하고 밤에는 낮동안 흘린 땀을 씻느라 목욕도 했던 곳이야.”라고 말했다.
김봉례 어르신은 또 “군에서 느티나무 주변으로 1년에 한 번인가 두 번인가 풀은 깎던데 아마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마을이면 주민들도 쉬고 고향을 떠나 나가 살던 출향인들도 고향에 오면 쉬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달라고 요구했을텐데 사람이 없으니 그것도 헛일이지 뭐. 아래 문티마을은 겨우 3집만 살아. 한 집은 도시에서 들어온 사람인데 동네에 며칠 안있어. 집은 여러채 있는데 다 빈집이여. 언젠가 사람은 다 사라지고 저 느티나무만 살고 있는 마을이 될 수도 있겠지.”라고 덧붙였다.
야은 길재 선생이 노래한 시조가 생각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 했다. 시조는 망한 고려왕조의 도읍지인 송도를 둘러보며 노래한 것이라 수한면 거현2리 아래 문티마을과는 상황이 다르나 산천은 의구(依舊)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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