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장마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7.20 09:45
  • 호수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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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 철 순
시인
마로면 관기약국

며칠 동안 비가 퍼부었다. 홍화씨를 베려고 계획했던 주말에 비가 내리니 어쩔 수 없이 텔레비전을 켜놓고 여기저기 비 피해 소식을 듣는다. 산사태로 집이 무너지고 인명 피해가 나고, 둑이 무너져 지하차도가 물에 잠겨 또 많은 인명 피해가 나고, 여기저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나도 냇가 가까운 집에 사는 지라 비만 오면 늘 불안하다. 비가 좀 잦아드는가 싶으면 우산을 쓰고 냇가에 가 보았다. 붉은 흙탕물이 냇가에 돋아난 풀과 나무들을 집어 삼키며 거칠게 흐르고 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섭기 까지 하다. 저 큰 입으로 무엇이든 삼켜버리리라. 논이든, 밭이든, 집이든.
며칠 전 약국에 들른 이장님은 복숭아 농사랑 논농사를 다 망쳤다고 한다. 비가 많이 와서 복숭아는 다 떨어지고 벼를 심은 논은 물에 잠겨 빠질 줄 모른다고 한숨짓는다.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온다. 오고 또 온다.
점심을 먹으면서 남편은 홍화씨를 베어야하는데 걱정을 한다. 그 까짓 홍화씨 좀 망쳐도 괜찮다고, 사람이 죽고 물난리가 나서 한 해 농사를 망친 사람도 많은데 얼마 안 되는 홍화씨 못 베는 건 걱정도 아닌 것 같다.
1980년, 그 때도 비는 하염없이 내렸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읍에 살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비 구경을 하고 있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와서는 얼른 피하라고, 둑이 터졌다고 했다. 동생은 딸아이를 안고 나는 아들 손을 잡고 막내는 업고, 걸음아 나 살려라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을 피해 성당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남편이 뒤에서 불렀다는데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저만 살겠다고 도망가기냐고 하는데 빗소리 때문인지 정말 듣지 못했다. 
성당에는 이미 둑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고 방송도 했다는데 거친 빗소리 때문인지 나는 듣지를 못했다. 
저녁때쯤 물이 빠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온 마을이 폐허가 돼 있었다. 집이 무너지고 여기저기 살림살이가 돌아다니고, 집에 도착하니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방에 물이 중간쯤까지 찼었는지 벽지가 젖어있고 살림은 모두 떠내려가고 냉장고는 담벼락에 걸쳐있고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서 피난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나와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국무총리가 다녀가고 구호물품이 지급되어서 그것으로 며칠을 살아야했다. 아니 한참동안 그렇게 살았던 거 같다.
그렇게 온 몸으로 장마를 겪어서 그런지 장마가 시작되면 불안하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이재민 소식을 들으며 저 분들이 얼마나 힘들까도 생각한다. 그런 것보다 더 한건 인명 피해일 것이다. 집은 무너지면 고치면 되고 살림은 다시 사면되지만 돌아가신 분들은 다시는 올 수 없지 않은가. 그 때도 중학생이 떠내려가다 나무에 걸려 붙잡고 있다가 물이 빠져서 살았다는 얘기며, 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무너져 떠내려 갔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 나야 오래전 이야기라 잊고 살다가 장마 때면 잠깐 생각이 나지만 가족을 잃은 분들은 평생 가슴에 한이 맺혔으리라.
어릴 때 바로 앞에 냇가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냇가에 가서 세수를 하고 이도 닦고 송사리가 헤엄치는 것도 보면서 하루를 상큼하게 시작하곤 했다. 엄마는 푸성귀를 씻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며 냇가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터였다. 장마가 시작되어도 흙탕물이 한 번도 집을 넘보지 않았고 그냥 조용히 흐르다가 맑아지곤 했다. 옛날엔 그랬다.
빗물이 잦아들 길에 시멘트를 바르고 냇가에 둑을 쌓고 물길을 바꾸고 아무튼 사람들의 편리함 때문에 그 재앙을 오롯이 사람들이 되돌려 받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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