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 선조유적 2차 답사 성료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 선조유적 2차 답사 성료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7.13 09:31
  • 호수 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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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 모
(보은 종곡 출신, 서울 무역업체 운영)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 선조유적지 답사가 20여명의 종인이 참가한 가운데 7월1일 관련 유적지에서 진행됐다. 이번 답사는 재경종회 청년회(회장 23대 현모)가 주최하고 대종회(종장 22대 홍빈)와 재경종회(회장 22대 홍석)가 후원했다.
지난 3월 판도판서공파 1대조로 중시조인 장유(고려말 판도판서역임)께서 보은지역으로 입향한 과정 및 후손들(2~3대) 묘역과 정착과정을 주로 살펴봤던 1차 답사에 이어 이번 2차는 보은 지역에 산재된 관련 유적지 중 4~7대에 연관된 곳을 계대 순서에 따라 답사했다.

첫 목적지는 회남면 남대문리(만마루길)에 자리한  4대 호(滸 - 평택현감)의 유택인 고현재(충청북도 문화재자료 72호)와 묘소로 정했다고 한다.
고현재 뒷산에 있는 묘소는 영특한 산 꿩이 잡아준 길지(吉地)라는 전설이 깃든 곳이라 전해지는데, 22대 홍길 대종회 사무국장에 따르면 풍수전문가들은 이 곳을 ‘명당 중에 명당인 봉황귀소형(鳳凰歸巢形)’이라 부른다고 한다.(승지공 상중에 며느리 옥천황씨(沃天黃氏)가 사냥꾼에 쫒긴 꿩을 구해주자 이튿날 꿩이 다시 날아와 자리를 잡아주어 장지를 정했고 그 후 후손들은 꿩고기를 먹지 않아 ‘꿩김가’라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24대 병서(유트브에서 김병서TV 운영)는 이곳에서 고려 최영 장군과 관련된 만마루란 지명과 고사를 설명하며 호점산성 및 염티재에 얽힌 이야기들은 물론 각각 유적지에서도 별도의 관련 설명을 더 해 참석한 종인들의 이해를 도왔다.
다음으로 수한면 동정리에 있는 5대 처용(處庸 : 都漆署丞, 贈兵曹參判) 묘역을 살펴보았는데 동자석등은 도난을 당하여 최근에 새로 세운 것이라 한다.
이곳에서 승지공 호 묘지와 관련된 전설을 가진 처용의 부인 옥천황씨(沃天黃氏)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접할 수 있었다.
부인은 당시 여자로 드물게 경사(經史)에 능통해 자녀를 손수 교육시켜 아들과 손자들에서 문과(文科)급제 3명[둘째아들 효정(孝貞) / 손자 황(黃, 첫째아들 증손 장남) / 정(淨, 둘째아들 효정 차남)], 사마(司馬 : 生員,進士)등제 4명[첫째아들 증손(曾孫) / 손자 적(赤, 증손의 셋째) / 광(光, 효정 장남) /  역(易, 효정의 셋째)]을 배출시켜 판도판서 경주김씨 문중을 치마양반이란 애칭으로 불리게 한 걸출한 여인이였다고 한다.
김처용(金處庸) 부부의 묘소 아래에는 차남인 효정부부와 손자인 광 부부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김효정(金孝貞, 1446~1500)은 자가 인초(仁初)로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뒤에 둘째 아들 충암(沖菴) 정(淨)이 귀하게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김광(金光 1482~1542)은 자가 희실(希實)이고 장암은 호로 후손들을 장암파라고 한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창능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았으며 기묘사화로 아우 충암이 화를 당하자 당질(堂姪)인 천우[天宇 : 전한공(典翰公)]와 함께 시신을 회덕(지금의 대전)으로 옮겨 온 후 세상을 피하며 나라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숨어 학문에 전념했다.
오후에는 내북면 동산리 선영에 있는 6대 증손(曾孫) 묘역으로 이동했다.
증손은 처용(處庸)의 장남으로 왕의 식사나 궁중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사옹원(司饔院) 판관(判官)을 역임한 관계로 후손을 판관공파라 부른다고 한다.
이곳엔 증손의 장남인 황(黃 : 承文院㕘校)부부, 차남인 부사직 벽(碧 : 副司直) 부부 등 후손들이 모셔져 있다.
증손(曾孫)과 벽(碧) 양대(兩代)의 제사(齋舍)를 ‘선조(先祖)를 사모(思慕)하는 집’이란 뜻을 가진 ‘이모재(履慕齋)’라고 한다. 언제 건축됐는지 지금 상고(詳考)할 수는 없으나 조선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묘역 설명 중 병서 종인은 1928년 중수기에 ‘호사스러움과 검소(儉素)함을 절충하였으니’란 문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이어갔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백제 궁궐의 특징을 표현하며 처음 사용한 글로, 조선의 초석을 놓은 정도전이 경북궁의 건축미를 지칭하며 준용한 말이라고 하며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를 인용해 건물을 중수한 선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곳 묘역에 있는 벽의 부인 묘소앞 묘갈 ‘숙부인문화유씨지묘(淑夫人文化柳氏之墓)’는 1564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어 보은군내 묘갈비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위인 대곡 성운이 짓고 당대 해서(楷書)의 명인인 이택(李澤)이 쓴 것으로 문화재급이라 한다.
한 여름 무더위 시작을 알리는 7월 1일의 폭염을 뚫고 진행된 관계로 예정되었던 곳을 다 갈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지만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선조들의 유적을 찾아 뜻을 기리는 후손들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이곳을 끝으로 2차 답사를 마친 재경종회 청년회 현모 회장은 다음엔 집안과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인 충암 김정선생 관련 유적지를 답사할 예정이고, 2대 조부인 중남의 3남인 을당 조부가 이거해 형성된 또 다른 집성촌이 있는 경북 고령 지역도 답사하겠다는 계획을 꼭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9대 노성현감 가기(可幾)가 짓고 그의 아들 간서재 덕민(德民)이 쓰고 세운 처용의 묘비(墓碑)는 없어 졌으나 묘갈문(墓碣文)은 전해지고 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金堤郡守가 늘 墓碣이 없음을 섭섭해 하셨음으로 감히 그 뜻을 받아 돌을 깎아 세운다(先考金堤郡守墓碣嘗以無碣爲有憾故敢承前志伐石以竪)’라 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역사는 받들어 가꾸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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