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탄부면 고승리
(75)탄부면 고승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7.06 09:17
  • 호수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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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기름지고 수량이 풍부해 농사가 곱빼기로 생산된다는 탄부면 고승리

넓은 보들과 풍부한 보청천 물로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고승리 마을은 최근 귀농귀촌을 문의하는 젊은이 들이 부쩍 많아졌다. 
가재가 많이 살았던 마을 오늘은 탄부면 고승리를 소개하는 날이다. 
고승리는 보은읍 남쪽 약 4km지점에 있는 마을로 양파생산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고승리 마을에서 생산되는 양파는 매봉에서 흘러나온 비옥한 토질과 깨끗하고 맑은 보청천물을 먹고 자라 단단하고 단 맛이 강해 최고의 품질로 각광 받고 있다. 
일주일 넘게 장마전선이 머물고 있는 보은은 하루에도 몇 번씩 국지성 호우가 내리고 한나절 온도는 30°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더위가 몇 일째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오늘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더위를 피해 오후 늦게 고승마을을 찾아가는데, 무터 넘어 보들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가 나그네를 부르는 듯 흔들거리고 있다. 
끌리듯 느티나무로 발걸음을 옮기니 나무 아래 젊은 농부 한 사람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어디에서 오셨는냐고 물어온다. 마을이야기를 쓰는 중이라고 하니 몇 년 전 세종시에서 귀농했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 냐고 궁금해 하니 오이농사를 지으려고 하우스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하우스 속 온도가 50°가 넘는답니다. 정말 엄청난 더위네요.“ 너무 더울 때는 쉬어가면서하라는 필자의 말에 오이모종이 도착해 쉴 시간이 없다고 한다. 하루라고 빨리 이식해야 하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걱정이라며 하우스 속으로 들어간다. 
뜨거운 여름날 비닐하우스 속에서 희망을 심고 있는 젊은 농부의 바램이 꼭 이루어져 전국최고의 농민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고승리 마을회관은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고 마을회관 앞으로 커다란 창고가 있는 것이 보인다. 마을회관에는 아무도 없고 마을안쪽 정자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급히 정자 쪽으로 차를 돌려 다가가니 마을사람들이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냐고 궁금해 하신다. 마을이야기를 듣고자 찾아왔다고 하니 “우리 마을은 옛 부터 장수마을이랍니다. 여기계신 어르신은 올해 90세이시고, 그 옆에 어르신은 84세랍니다.” 올해 83세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어르신께서 주위주민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신다. 
옆에 있는 젊은 사람은 90세 되신 분의 아들인데 주말에는 꼭 내려와 집안일과 마을의 구진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옛날 시저골(쇠저골)에는 물 좋은 샘이 있었지요.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 마을은 샘이 많기로 유명했답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샘들이 있지요.” “그렇군요.” “도라무테샘, 시조골샘, 골안샘, 마을끝 쪽 샘 등 물 좋은 샘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고 있다 보니 고승리는 물이 풍부했던 마을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이 풍부한 덕에 지금도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이랍니다. “ “보기에는 작은 마을 같은데, 100여명이 살고 있군요.” “우리 마을은 물이 좋고, 넓은 들을 가지고 있고, 특히 보청 천에서 흘러오는 물은 일 년 내내 풍부한 수량 때문에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이 커진듯합니다.“
마을일을 도와주러 왔다는 청년은 최근 고승리에 귀농 귀촌하는 분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조금 전 귀농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고승리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적인 정착을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마을안쪽으로 들어간다. 

#땅이 기름지고 수량이 풍부해 농사를 지으면 곱빼기로 생산되고, 곡식을 거래 할 때는 고봉으로 준다고 하여 고승(高升)이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옛날에 매봉재 됭개밑 골짜기에 부처 골이라는 곳이 있었고, 분터골에는 도깨비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어 어렸을 적에는 무서워 그곳을 가지 못했지요. 분터골에 작은 암자가 하나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주민 한 분이 나도 한마디 해야 겠다며 어른들께 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신다.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이야기를 들려주신 고승리 분들의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듣고 마을을 둘러보는데, 마을자랑비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 마을 고싱기는 마을 앞 무터들이 기름져 농사를 지으면 곱빼기로 생산되고 곡식을 거래 할 때는 고봉(넘치게)으로 준다고 하여 고승(高升)이 또는 고승기라 불러 왔는데, 행정구역 통폐합 시 고승리라 하고 탄부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마을은 된서리가 가장 먼저 내리고 경사가 급하다 하여 됭개 산이라 부르는 산을 배산(배산)으로 하고 잭배기능성이를 경계로 평지에 형성된 아랫말과 중산 간에 이루어진 윗말의 두 자연마을을 중심마을로 조선 중종 때 경주김씨 판도판서 공 후손과 인종 때 상촌 공 후손들이 들어와 살기시작하고 인조 때 순흥안씨가 경종 때 풍천임씨가 순조 때 은진송씨가 입향하고 또 여러 성시가 모여들어 오순도순 살아가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근본삼아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어질게 살아가니 이웃마을 사람들이 삶터의 으뜸이라 칭송하고 부러워하였다. 풍천임씨 임향조인 임조(任遭)공은 충청도관찰사 때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바위 등에 10층 부도를 부수어 버렸다는 임의백(任義伯)감사의 증손자로 우리고을 보은현감과 인천부사로 있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증조부가 귀양 갈 때 같이 파직되어 서울숭례문 안 양생방에서 우리 마을로 임향하여 살게 되었는데, 노론(老論)의 명문집안으로 학문을 숭상하니 이웃마을에 양반촌(兩班村)으로 명성을 떨치고 이 전통은 향학열이 되어 동경유학생을 배출한 전통의 마을이었다. 마을 앞 둥구나무는 옛날 마을 앞이 개울이었을 때 떠내려 오다 둑에 걸려 자란 것이라고 전해오는 등 마을주위의 숱한 전설이 살아 있는 우리 마을이다. 고승리는 예부터 풍성한 곡식으로 유명했던 마을답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부농의 꿈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이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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