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중학교 동문회를 다녀와서
보덕중학교 동문회를 다녀와서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6.22 09:35
  • 호수 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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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 철 순
시인
마로면 관기약국

중학교 동문회를 다녀왔다. 해마다 5월이나 6월초에 모교에서 동문회가 열린다. 남자애들은 대머리에 머리가 하얀 70대의 노인들이 거기 앉아있었다. 여자애들은 좀 가꾸고 염색을 해서 그런지 그렇게 낯설지 않은데 말이다. 그 남자 애들도 우리 여자 애들을 그렇게 늙은 여자로 보일까 생각하니 쿡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돌려 오빠 동기들이 앉은 8회 자리를 보니 2~3명이 앉아 있었다. 오빠가 오지 않아서 그런지 왈칵 눈물이 났다. 80이 가까우니 못 오신 분들도 있고 돌아가신 분들도 있으리라. 서러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참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나에게 가장 즐겁고 행복한 학창시절을 꼽으라면 중학교 시절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는 생긴 지가 얼마 안 되고 같은 부락에 사는 지라 늘 보는 얼굴이라서 새롭지 않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사이버로 다닌지라 그렇게 많은 추억이 없다. 
중학교는 마로면, 탄부면, 장안면까지 3개면에서 모인지라 꾀나 많은 아이들이 모였다. 십 여리의 등하교 길을 걸어서 다녀야 하는 고달픈 여정이었지만, 풋풋한 그 시절의 추억이 오래 내 마음 속에 들어 앉아 있다.
70년대 초반 배고픈 시절이었다.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애들은 더 그랬다. 나도 중학교를 갈만큼 형편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런 어려운 형편이었다. 작은 논밭을 일구는 부모님에게 여자인 내가 중학교를 진학 한다는 건 사치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엔 말이다. 중학교 시험을 치러 가는 날, 아침밥을 먹으면서 엄마는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과묵하신 아버지는 시험을 치르고 나오니 교문 앞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자를 쓰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얼마나 반갑던지, 아버지와 함께 관기장터에서 찐빵을 사먹었던 거 같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없이 사랑을 주는 분이었다.
교복을 맞춰서 집에 가져다 놨는데 이웃에 사는 진학을 하지 못하는 아이가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지, 그때는 어려서 그 아이의 눈빛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다.
좁은 오솔길을 걸어 학교에 가면 바지 아랫단과 운동화는 늘 이슬에 젖어 있곤 했다. 기대, 소여, 원정, 세중, 한중, 갈전, 변둔 등 남부 쪽 아이들은 각자의 마을 오솔길을 걸어 좀 더 넓은 길인 기대에서 만나곤 했다. 거기서부터 한 명은 두 명이 되고 두 명은 네 명이 되기도 하며 그룹이 지어져 이야기꽃을 피우며 학교까지 걸어가곤 했다. 사계절을 몸으로 겪으며 들꽃향기도 만나고 새소리도 만나고 소나기도 만나고 땡볕도 만났다. 나는 학교에서 한 공부보다 그렇게 길에서 몸으로 겪은 공부가 오래도록 남아있고 시를 쓰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농촌 인구 감소로 작년 졸업생이 아홉 명이고 올해 입학생이 다섯 명이라고 한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200명 가까이 학교를 다녔는데, 참담하고 불안하기까지 하다. 이러다 내 모교가 사라지면 어쩌나?
내가 만약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작은 종이에 영어 단어를 적어서 외우며 등하교를 하지 않았다면, 영어를 좋아하지 않았을 테고, 길가에 핀 들꽃을 새소리를 시냇물 소리를 아침 이슬을 매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시인으로 살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준 풋풋한 그 시절이 고맙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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