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탐방(50)-마로면 관기2리
우리마을 탐방(50)-마로면 관기2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2.08 11:19
  • 호수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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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이 후하고 수신의 정신을 심어주는 마로면 관기 2리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편집자 주>


관기2리 마을 전경 모습. 웃사여와 아래 사여를 통합해 관기2리로 개정되었고 34세대 정도가 살고 있는 풍경 좋은 마을이다.
관기2리 마을 전경 모습. 웃사여와 아래 사여를 통합해 관기2리로 개정되었고 34세대 정도가 살고 있는 풍경 좋은 마을이다.

#물이 풍부해 샘이 많았던 성뫼(성밑)마을은 물 만큼이나 인심이 후해 범죄 없는 마을   
이번주는 고려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전설을 지닌 관기 2리를 소개한다.
관기 2리는 웃 사여, 아래 사여를 통합하여 지금의 관기 2리로 개정되었다. 마로면 중심가인 관기 장터 동남쪽 2km 지점에 있는 마을로 34세대 정도가 살고있는 풍경 좋은 마을이다. 
필자가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어디선가 낙엽 타는 냄새가 코끝을 상큼하게 하는 것이 깊어가는 가을을 말해주는 듯하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회관 마당 옆에서 바쁘게 들깨를 갈무리하고 있는 구찬서(70)어르신이 계신다. 인사를 나누고 마을 소개를 부탁하니 일손을 멈추고 마을 내력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 
“우리 마을은 샘이 여러 곳 있었던 마을이랍니다. 지금은 공동 상수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마을 회관 옆에 물이 풍부한 두레박 샘이 있었고, 마을위쪽에도 물이 풍부한 샘이 있었지요. 그때는 우리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현재는 34가구 70명 정도가 살고 있답니다. 마을 뒤로는 소여 넘어가는 질기 고개가 있었고요, 그 옆으로 은이 나왔다고 하는 은 골이 있답니다. 지금도 몇 가구가 살고 있지요.”

은이 나왔다고 하는 은골. 지금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은이 나왔다고 하는 은골. 지금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관기산성 아래 금계천이 휘둘러지는 관기2리는 은이 나왔던 마을
관기2리는 통일신라 때 쌓은 것으로 알려진 관기산성이 있었던 산이라 해서 성뫼산이라고 부르는 산 아래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 말에 의하면 산 위 정상부에는 지금도 당시 쌓았던 석축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고 한다. 
관기산성(官基山城)은 금계천(金溪川)을 따라 길게 내려오다 보청천과 합류하는 지점 동쪽에 있는 작은 산 위에 있는 성인데, 지금도 신라계의 토기와 고려시대 토기가 발견되는 성이다. 
관기산성은 옛날 상주 등 영남 방향과 김천, 영동 등 호남 방향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살피는 피난 성으로 추축하며 신라와 고려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라고 한다.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관심있는 분들이 지역문화 유적으로 연구발전 시켜 보은의 정신문화와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가치가 많은 성이다. 마을 주민의 친절한 설명을 마치고 성뫼산 앞 고봉정사를 찾아가려고 발길을 돌리는데, 사여 마을 유래비가 눈에 들어온다. 
유래비는 마을에 살고 있는 최씨, 려(여)씨, 김씨, 장씨, 이씨, 구씨, 박씨 차씨(崔氏, 呂氏, 金氏, 蔣氏, 李氏, 具氏, 朴氏, 車氏) 등 34세대 70여 명이 다정하게 살고있는 마을로 조상들의 유지를 잘 받들어 어른을 공경하고 후세에 계승하여 범죄 없는 마을로 인정을 나누는 사여인(士余人)의 정신을 오래도록 이어가고자 한다고 쓰여 있다. 
마을 유래비를 뒤로하고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낙향한 원정 최수성과 충암 김정, 병암 구수복 선생들이 한세대를 살며 후학들을 강학했던 고봉정사를 찾아가는데, 저 멀리 시루봉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가을바람이 사여들을 지나 고봉으로 지나간다. 고봉산은 옛날 개벽 당시 시루봉 상봉이 떠내려와 의롭게 정착되었다고 해서 고봉이라 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산으로, 사여들 가장자리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작은 독산이다. 이곳에 삼현정(三賢亭)이라고도 불리는 고봉정사(孤峯精舍)와 능성구씨 석조보갑(綾城具氏 石造寶匣)이 있다. 정사(精舍)는 학문이 깊고 명망 높은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또는 벼슬을 하다가도 향리(鄕里)나 경승지(景勝地)에 은거(隱居)하면서 학문(學文)과 수신(修身)을 가르치던 일종의 사 교육장이다. 

고봉정사. 조선 중종때 학자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문정공 원정 최수성, 충암 김정 선생, 병암 구수복 선생이 기묘사화 전에 낙향해 정자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학했던 곳이다. 고봉정사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이다.
고봉정사. 조선 중종때 학자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문정공 원정 최수성, 충암 김정 선생, 병암 구수복 선생이 기묘사화 전에 낙향해 정자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학했던 곳이다. 고봉정사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이다.

#고봉정사에서 호서 3현이 후학들 강학하며, 수신의 정신을 심어주는 마을
“이곳에는 조선 중종(朝鮮 中宗) 때 학자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문정공 원정 최수성(文正公 猿亭 崔壽城), 충암 김정 선생((金淨 先生), 병암 구수복(屛巖 具壽福) 선생 세분이 기묘사화(己卯士禍) 전에 낙향하여 정자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학했던 곳이다. 산 정상에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고 묘정이 없었으나 지금은 새롭게 재축하였다. 원정은 당시 명망 높은 학자로서 시문, 서화, 음률, 수학에 뛰어났으나 1521년 중종(中宗)16년 신사무옥(辛巳誣獄)(신사무옥 1519년 기묘사화 때 연관되었던 인물들을 추가 축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에 연류 되어 사형되었으며 후에 영의정으로 추승 되었다. 충암 김정 선생은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승 되었으며, 충암 김정 선생 또한 1519년 기묘사화에 연류되었다. 사형위기에 처했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안치되었다. 그 뒤 1521년 신사무옥 때 사사되신 분이다. 병암 구수복(屛巖 具壽福)은 이조좌랑을 지내고 부제학(副提學)에 추승 되었다”고 한다. 이조 좌랑은 정6품으로 당하관(堂下官) 이하 관원을 천거(薦擧)하는 자리로 재야인사 추천권을 가진 막강한 직책이었다. 정랑(정5품), 좌랑(정6품) 두 품계를 전랑이라고 했는데, 전랑을 거치면 재상으로 오르는 자리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붕당으로 이루어지다 사화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조전랑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다툼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역사를 좌우했던 요직중의 요직이었다. 고봉정사 현판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사화의 한 접점에 있었던 학자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마로면 관기2리 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어느 집에서 피어오르는 굴뚝연기가 필자의 발걸음을 잡는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마을 회관 옆에 물이 풍부한 두레박 샘이 있던 자리. 물이 풍부한 샘이 있어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지만 지금은 34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회관 옆에 물이 풍부한 두레박 샘이 있던 자리. 물이 풍부한 샘이 있어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지만 지금은 34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관기산성은 금계천을 따라 길게 내려오다 보청천과 합류하는 산위에 있는 성으로 지금도 신라계의 토기와 고려시대 토기가 발견되는 성이다.
관기산성은 금계천을 따라 길게 내려오다 보청천과 합류하는 산위에 있는 성으로 지금도 신라계의 토기와 고려시대 토기가 발견되는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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