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대한, 북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대한, 북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 류영우 기자
  • 승인 2009.09.24 11:53
  • 호수 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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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한옥 기술자 이석구·이은옥씨 부부

그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회양군 상북면이다. 금강산이 속한 내금강면도 그가 태어난 강원도 회양군에 있다. 일제강점기와 이념의 대립, 그리고 전쟁. 작은 농촌마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젊은 부부의 삶은 역사의 높은 파고 속에 폭풍속으로 빠져들었다.
올해 88세의 이석구씨와 이은옥(81)씨. 해방과 분단, 전쟁과 휴전, 이산과 결별로 이어진 우리의 역사는 노 부부의 굴곡진 삶과 분명히 닮아있었다.

#이야기, 하나
"그래도 그 때는 살만했어. 토지도 꽤 가지고 있었고, 남들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도 살수 있었으니까. 아! 그런데 일본 보국대 1차 모집에 걸려 버린거야. 임술생(1922년)과 계해생(1923년)은 보국대 징벌에 모두 포함이 됐거든. 그때부터 보국대 징벌을 피하기 위해 숨어다니게 됐지."

보국대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기 위해 만든 노무대의 일종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던 그 때, 일제는 민중의 피고름까지 짜가며 온갖 수탈을 일삼았다.
이석구씨 역시 보국대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이씨는 이를 피해 목수일을 배우게 된다.

"보국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여기 저기 숨어 다녔어. 그 때 셋째 큰아버지가 부르더라구. 그렇게 숨어 다닐 바에는 우리 공장에 와서 일하라고. 그렇게 셋째 큰아버지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됐고, 그때 목수일도 배우게 됐지 뭐."

그리고 해방을 맞았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 했지만 이씨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이 맞이하면서 남과 북은 다른 이념의 세상으로 나뉜 것이다.
같은 마을의 이은옥씨를 아내로 맞았지만 격변의 시대는 두 사람의 평범한 삶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사회주의가 뭔지도 몰랐던 시골의 젊은 부부에게 세상은 넘기 힘든 산이었다.
체제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어도 단체활동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면 그것만으로도 반동이 됐고, 이씨의 행동은 면서기에 의해 군 인민위원회로 보고가 됐다.

내무서(지금의 경찰서)에 있던 친구에 의해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이씨는 결국 38선을 넘기로 결심한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던 시절이었으니까. 내무서에 있던 친구가 여길 피해야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구. 할 수 없이 장사꾼들의 틈에 끼어 38선을 넘었던 거야."
그때가 해방을 맞이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던 1946년이었다.

#이야기, 둘
38선을 넘은 이씨는 외사촌들이 살고 있던 제천시 고양면에 정착했다. 북에 홀로 남아있던 아내 또한 2년 후인 1948년 38선을 넘었다.
고향을 떠나 벌목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이씨 부부에게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살 공간을 마련해 놓았지만 그마저도 모두 불타 없어졌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이씨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었다.
학교건, 관광서 건물이건 모두 불타 없어진 상황에서 다시 건물을 세우는 일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열심히 일한 덕에 제법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고, 제천역 앞에 내 땅도 가질 수 있게 됐다.
"빈손으로 내려와 비록 돌밭이었지만 땅까지 사게 됐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돌맹이들이 일곱겹 쌓여있다고 해서 바우배미라고 불리던 곳을 일구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돌을 치웠드랬지."
잠시 동안의 행복이었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씨가 38살이 되던 해에 신장염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오게 된 것이다.
결국 그동안 일궈온 땅들을 모두 버리고 강원도 영월로 향했다.

그리고 치악산에서 이씨 부부는 10년을 살았다.
신장염 치료를 위한 일이었지만 이곳에서 이씨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도 했다.
일명 '도'를 배운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복을 고집하는 것도 이때 배운 '도'의 영향이 컸다.

10년 이란 세월을 뒤로 하고 이씨 부부는 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고, 충주에서의 생활을 거쳐 30년 전 비로소 보은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야기, 셋
이씨는 한옥을 짓는 기술자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아직도 아름다운 우리의 한옥을 손수 짓는다.
올해 6월에는 청주에서 한산이씨 경모재와 관리사를 지었다.

산외면 봉계리 능성구씨 종중 제각과 내북면 신궁리 진주강씨 제실, 그리고 속리산 노인정도 모두 이씨의 손으로 지어진 한옥들이다.

무형문화재 삼포(석가래 밑으로 단을 세단 쌓는 기술)기능 보유자로서 이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한옥 짓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계획이다.

또 하나, 이씨가 포기하지 못할 것이 있다.
바로 고향에 대한, 북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씨 부부는 그 흔한 금강산도 가보지 못했다.
금강산을 보면, 턱 밑에 있는 고향마을이 더 그리워질 것 같아서란다.

"이산가족 상봉 후 부모와 헤어지는 모습을 TV로 보고 난 후 잠을 이루지 못했어. 부모님과 4살 위인 형님께서는 돌아가셨겠지만 어린 때 함께 지냈던 조카들만이라도 보고 싶어. 아내는 6남매 형제들을, 나는 조카들을 만나고 싶어 매번 이상가족 상봉을 위해 신청서를 내 보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안 되네. 금강산 관광이 다시 개통된다면 더 늦기 전에 금강산이라도 가보려구."

노 부부의 그리움에는 그 어느 곳에도 이념의 때가 묻어있지 않았다. 그저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단순하고 절실한 감정만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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