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책
저녁 산책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7.2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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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심웅섭
회인 해바라기 문화공작소 대표회인눌곡

요즘 때 아닌 저녁 산책에 푹 빠졌다. 워낙 뜨거운 여름이라서 한낮 더위를 피할 겸 운동 삼아 시작했는데 요게 뜻밖의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다섯 시에 집을 나서 차로 5분여만 달리면 회남면 남대문에 도착, 이곳에 주차하고 왕복 한 시간 반쯤 걷는다.
처음 코스는 산소와 과수원 사이로 농로를 따라 오르는 평범한 오르막길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자칫 지루하기 쉬운 구간이니 경치 구경보다는 열심히 걷는데 집중하는 게 좋다.
아직 한낮의 열기가 제법 남아 있는 시간, 어느새 호흡은 가빠지고 등줄기가 땀에 흠뻑 젖는다. 10여분을 오르면 과수원이 끝나고 조금만 더 오르면 제법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확 트인 대청호와 다도해를 연상시키는 산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도 고를 겸, 이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들어 바라본다. 가슴이 확 트인다. 왼쪽으로는 회남대교를 지나 어부동과 방아실로 이어지는 도로가 마치 숲 속 오솔길처럼 가늘게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문의를 거쳐 신탄진으로 이어지는 대청호가 펼쳐진다. 이곳에서 만난 어떤 분은 여기가 마치 중국의 계림과 흡사하다고 감탄을 해 댔을 정도다.
더구나 우리 부부가 이곳을 지나는 시간이 저녁 무렵이라서 물에 담긴 낙조를 보는 경우가 많으니 더욱 좋다. 대청호를 지나온 바람이라도 한줄기 뺨을 어루만져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여기에 금상첨화가 한 가지 더 있다. 우리 부부가 걷는 길이 얼마 전부터 노란 꽃으로 뒤덮여 꽃길을 이룬 것이다. 아무리 오가는 사람이 적다고 해도 도로 가운데 일부러 심었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길옆에 심은 금계국의 씨앗이 날려서 도로를 덮은 것이리라. 봄부터 새싹들이 가끔씩 머리를 내밀던 것을 못 본 것은 아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길을 수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붉은 대청호의 낙조를 바라보며 노란 꽃길을 걷는다. 
대청호를 바라보는 조망과 꽃길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여기에 뜻밖의 보너스가 또 있다. 길 가에 복분자와 산딸기가 흐드러지게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검붉게 익어가는 복분자의 달달한 유혹을 그냥 지나칠 재간은 없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심조심 따서 입에 넣는다. 처음에는 한 두 개씩 따서 입에 넣었는데 워낙 많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오른손으로 따서 왼손에 담아 한꺼번에 입에 쓸어 넣는다. 깊고도 오묘한 단맛이 입에 가득하다. 한편으로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맛있는 과일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따 먹으려니 복분자 덩굴에게 미안한 것이다. 셈을 치러야 할 텐데, 값이 매겨져 있지도 않고 돈을 받을 것 같지도 않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값을 치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복분자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멀리멀리 씨앗을 옮겨주라는 뜻에서 과일을 매달았을 터이니 결국 씨앗만 퍼뜨려주면 그게 값을 치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맛있게 먹고 나서는 몇 개를 숲 사이로 던져주는 것으로 값을 치른다. 물론 잘 먹었다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말이다.
복분자로 배를 채우고 임도를 벗어나 오솔길로 접어든다. 오솔길이라고는 하지만 관리가 돼 있어서 걸을만하다. 간혹 성급한 칡덩굴과 잡목들이 손을 내밀기도 하지만 걷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고 가파른 오르막에는 나무로 계단까지 만들어져 있다.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면 정상에 이르는데, 멋들어진 이층 팔각정 전망대가 지어져 있다.
우거진 참나무 사이로 멀리 속리산과 구병산 줄기, 대청호와 피반령이 보인다. 이 멋진 길과 전망대가 우리 부부를 위해서 세워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우리 둘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점점 찬란하게 붉어지는 서쪽하늘도, 계림에 비교할 만큼 아름다운 대청호도, 가끔씩 불어주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도 모든 것들이 완벽한 세팅을 이뤄서 말이다. 도시가 아닌 시골의 자연 속에, 그것도 속리산과 대청호가 어우러진 보은군 회남면에 자리잡은 것은 어쩌면 신의 한 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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