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보릿고개와 찐보리쌀(2)
(15) 보릿고개와 찐보리쌀(2)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6.16 09:14
  • 호수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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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범 시민기자
주식으로 사용됐던 보리가 줄어들어 주식으로서의 개념이 사라졌다.

 

보릿고개는 우리에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에도가뭄과 메뚜기 떼들의 극성으로 봄철에 굶어 죽는 백성들이 발생하였다는 기록이 많고,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 후에 회수하는 빈민구제 제도가 있었다. 고려 때에도 태조가 흑창(黑倉)을 설치하여 진대(賑貸)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보릿고개를 대비하여의창(義倉)과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나라에서 춘궁기에 쌀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때 갚게 하는 환곡(還穀)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왕후가 된 계기도 영조대왕이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가 어떤 고개인가 ?’라는 질문에 다른 규수들과는 다르게보릿고개라 답하여 간택되었다는 야사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보릿고개가 구조적으로 정착되어 1960년대까지 연례행사처럼 혹독하게 겪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 들은 보은지방의 경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실시한토지조사을 통해토지등기와 지번제도를 만들어 매매가 원활하게 되면서 전체 농가의 3%인 소수의 지주가 전체면적의 50%를 소유하게 만들어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소작농의토지경작권마저 박탈하여 반봉건적 지주제를 만들어 농촌을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시켜 놓았다. 80%에 달했던 소작농들은 70%가 넘는 소작료를 지불하고도 토지세와 각종공과금, 용수료(用水料) 및 수리(水利)조합비 등을 내고 나면, 일 년 동안 죽도록 농사를 짓고도 고작 수확량의 25% 정도 밖에 돌아오지 않아 보릿고개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일제의 쌀 수탈정책에 따라 우리나라 쌀은 일본으로 보내고 만주의 좁쌀과 콩 깻묵 등을 들여와 먹게 함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릿고개의 절정을 맛보게 하였다. 보은읍 산성리에서 살고 있는 임선묵(78)씨는우리 식구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13식구가 살았는데 너무 가난하여 저녁에는 의례 보리쌀을 타서(갈아) 큰 가마솥에 넣고 아욱 등 채소를 한 지게나 넣고 끓여서 먹거나, 멀건 칼국수를 먹고 살았어요. 그래서 하도 지긋지긋해서 나는 지금도 보리밥이나 죽 종류, 아욱국을 먹지 않아요.’하면서 옛날의보릿고개를 회상하신다. 이러한 보릿고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되면서 미국 등에서 식량을 대량 수입하여 식량 부족을 일시적으로 해결하면서, 점차 통일벼의 개발과 화학비료와 농약의 공급 확대로 벼의 수확량이 많아져 서서히 사라져 갔고, 7,000년 전부터 인간의 주식으로 사용되었던 보리도 급격히 줄어들어 주식으로서의 개념이 없어졌다. 그래도 70대의 할아버지가 손자의 밥투정하는 것을 보고 옛날의보릿고개애기를 하자할아버지 쌀이 없으면 고기나 빵, 라면을 먹으면 되는데 왜 굶었어요 ?’하는 질문에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도 아직은 종종 경험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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