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報恩)이 좋아
보은(報恩)이 좋아
  • 편집부
  • 승인 2011.09.01 10:29
  • 호수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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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회(서울 여의도/마로 관기)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가을철에 속리산에 가서 보았던 아름다운 경관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서 역력하게 기억난다. 그 시대에는 자동차가 없어서 높은 산 고개를 터덕터덕 걸어서 넘어 다녔다.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단풍이 울긋불긋 곱게 물들기 시작한 오솔길 옆 밤나무 밑에는 알밤이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어도 주어가는 사람이 없어서, 한 톨씩 부지런히 물어 날라 겨울양식 저장하기에 바쁜 다람쥐들만 우글댔다.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창건된 법주사 경내의 국보 55호인 팔상전 지붕위에는 신라 중기에 만든 희귀 청기와 두 장이 남아있어, 발길을 멈춘 관광객들이 신기한양 바라보았다.

1400년대 중반, 세조 대왕이 머문 복천암의 지붕은 기와 아닌 두꺼운 송판이 덮어 있었는데, 오랜 세월 눈L
비 다 맞고 부식도어 송홧가루에 묻혀 날려 온 씨앗이 거기서 톡 터 자라난 소나무가 마치 고송의 분재를 올려놓은 것 같아, 못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을 끌었다.

법당 마당 곁의 절벽 암반에서 솟는 청정수도 나무로 만든 긴 홈통으로 흘러내려 쪽박으로 받아 마셨는데, 산길 오르느라 숨을 헐떡이면서 떠 마신 그 물 맛은 비할 데 없이 시원했다.

복천함 요사에서는 동그랗고 넓적한 보석에 글을 새긴 보물 한 점이 붉은 색 비단에 싸여서 놋 합에 담겨 보관된 것을 당시의 주지스님이 조심스레 펼쳐 보이며, 세조 대왕이 머물렀던 기념으로 하사한 것이라고 자상하게 설명했다.

사찰 옆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서 사방의 원근 주변을 둘러보니, 푸른 하늘 아래로 보이는 것은 오직 높은 산봉우리들과 거기에 이어진 산줄기들이 겹겹으로 둘러쳐져있어, 마치 산봉우리 파도가 넘실거리듯 멀어질수록 까마득하고 희미하여 잔잔하게 보였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잔잔히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산사의 풍경소리 외에 가끔 들리는 산새 몇 마리의 지저귐을 빼고는 고요한 적막뿐이었다.

이곳에서 수도에 정진하는 스님이 별천지 사람 같아 “산 속 생활에 어려움 없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잠시 망설이다 “소금을 사오는 일이 어렵다"고 한다. 장을 담구거나 나물 무치는데 간 맞추려면 꼭 필요한 것이 소금이어서, 해마다 가을에 산판에서 잣을 따 모아 지게에 지고 말티재를 넘어 보은장터까지 40리를 걸어가서 팔아, 그 돈으로 소금을 사서 젊어지고 다시 40리 길을 걸어서 되돌아오는데, 워낙 무거워서 무척 힘이 든다고 했다.

어느덧 6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그때를 돌이켜 회상해보면 꿈속을 유람하는 것만 같다. 새로운 문물의 발달로 세상이 엄청나게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만물이 다 변한 것은 아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1541년 전인 신라 자비왕 13년(서기 470년)에 축성된 삼년산성은 아직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한 채 많은 전설과 역사의 교훈을 품고 그대로 있다.

우리는 늘 오가는 시간 속에서 사물의 수량을 세며 세상을 살고 있는데, 숫자로 10의 -18승(Atto)인 찰나(刹那)는 시간으로 75분의 1초이지만, 반대로 멀고 긴 쪽으로는 겁(劫)이 있다.

8만4천살에서 100년에 한 살씩 줄여 10살이 될 때, 다시 100년에 한 살씩 더해나가 8만4천살이 되는 기간을 '소겁’으로 하여, 20소겁이 '중겁’이고, 4중겁이 '대겁’이다. 인생은 100년을 '1기’로 친다. 이래서 영겁의 시공 속, 사람의 생애는 한 점의 티끌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우주안의 만물 가운데 스스로 역사를 이루어 이어가는 위대한 존재는 바로 사람이다. 그런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자연과 인류로부터 받은 유형·무형의 많은 혜택들은 모두 다 '삶의 빚’이다. 은혜로운 터전 보은에 사는 보은사람들의 '보은(報恩)’이 좋은 깊은 뜻도 여기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작은 '찰나’는 비록 짧은 동안이지만, 육안이나 심안으로 다 보지 못하는 온 누리의 삼라만상 속에서 진솔한 자아의 본성을 찾으려고 고뇌하는 우리들의 참모습까지도 실상대로 모두 다 살펴보면서 영겁으로 한없이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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