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의 명성과 유적지를 찾아서
양녕대군의 명성과 유적지를 찾아서
  • 편집부
  • 승인 2011.08.11 09:53
  • 호수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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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탁(내북면 이원리)
▲ 이병탁

양녕대군 이제(1394-1462)는 조선 제3대 태종의 장남이다. 서기 1403년(태종 3년) 10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된 인물이다.

그는 동생인 충녕대군(후일 세종대왕)에게 세자를 양위하기 위해 양광(佯狂, 거짓으로 미침)과 방탕의 세월을 보냈다. 25세의 나이가 되던 1418년(태종18년), 세자 책봉 15년만에 폐세자가 됐다. 그는 폐세자로 확정되면서 '충녕, 아우가 나한테 속았다’면서 손뼉을 치며 웃었다고 하니, 비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비록 귀향살이의 부자유스런 몸이었지만, 세종대왕의 배려로 팔도강산을 이리저리 다니며,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 많은 일화를 남기게 된다. 44세가 되던 1437년(세종19년)에 귀양에서 풀려 자유스러운 몸이 된다. 이때부터 기록에 남아있는 양녕대군의 행적을 살려보고자 한다.

 

#주나라에 태백이 있다면, 조선에는 양녕이 있다
1450년(세종32년) 양녕은 가야산과 지리산을 거쳐 충청북도 문의면 기일봉으로 돌아왔다. 이 해가 세종이 승하하신 해이고, 기일봉 일대가 세종대왕이 하사하신 땅이기 때문이리라. 기일봉에 올라 사냥매를 날린 후, “산천의 아름다움이여, 가히 살만한 곳이구나"하였다 한다. 이곳 사람들은 세종대왕께서 양녕대군에게 하사하신 땅이란 뜻으로 '양녕대군 사폐지(賜牌地)’라 부르고 있다.

1475년(세조3년)에는 단종의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금성대군이 사사(賜死)되자, 풍간(風諫, 임금의 잘못이나 비위를 바르게 고치도록 지적함)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4일 충청도를 유람하던 중, 속리산에서 단종이 승하하셨다는 흉보를 듣게 된다. 이 때 양녕대군은 애통한 심정을 오언절구의 한시 '俗理山聞寧越凶報(속리산문영월흉보)’로 표현했다.

龍御歸何處(용어귀하처) 愁雲起越中(수운기월중) 空山十月夜(공산시월야) 痛哭訴蒼穹(통곡소창궁) 임금이시어 어디로 가셨나이까, 근심어린 구름이 영월에 일어나고, 온 산천이 텅 빈 듯 쓸쓸한 가을밤, 통곡하며 하늘에 호소합니다

1462년(세조8년) 양녕은 69세로 별세하게 된다. 임종에 앞서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상석도 하지 말라. 산소도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7대 후손들이 민망하여 단촐한 석상과 짤막한 비를 세웠다. 대군의 성품을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다.

세자자리까지 내던지고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주유천하하면서 많은 시서(詩書)를 남겼을 법한데, 글씨로는 숭례문 편액과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쓴 8폭 병풍 목각판이 전부다. 시로는 동궁에 계실 때 쓴 매화시, 영변 정향 1.2.3편, 속리산문영월흉보 등 8편이 고작이다. 양녕대군의 역량으로 보아 멋지고 많은 시를 남겼을 법한데, 이것뿐이라는 것이 아쉽지만은 지덕사기에 명시되어 있다.

지덕사(至德祠,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양녕대군의 사당)는 양녕대군이 별세한 뒤 210여년이 지난 1675년(숙종1년) 8월 13일 우의정 허목의 건의로 세웠다. 그로부터 114년 뒤인 1789년(정조13년) 어제(御製, 임금이 직접 짓거나 만듬)로 지덕사기를 걸었다.

그 내용은 '양녕대군의 발자취 찾기가 태백(주나라 태왕의 맏아들로 셋째 동생 계력에게 임금자리를 양보했음)보다 더 어렵다. 대군의 다양한 자취의 일부라도 엿볼 수 있었던 자가 드물다. 자기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삶은 어려운 삶이다. 명예를 사양함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겠는가, 천년이 지나도록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이는 양녕대군이 합당하다. 태백처럼 덕의 광채를 밝혀줄 聖人(공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논어에서 '태백은 지덕이다’라고 칭송했음)이 대군에게는 없다’로 요약된다.

이처럼 양녕은 세상에 흔적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조심스럽게 살다갔다. 이런 양녕의 흔적을 별세한지 549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찾는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속리산 일대에서 양녕대군과 밀접한 유적들이 있어,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속리산에서 양녕과 관련된 유적지가 나오다
전주 이씨(李氏)들은 오얏나무와 관련이 있는 씨족이다. 속리산면 삼가1리의 마을유래에는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수련할 때 형제봉에서 오얏꽃이 핀 마을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이화동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속리산면 만수리와 삼가리 일대 52만평의 임야가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특히 만수리 황토민박 뒷산(속리산면 만수리 산 7-2) 약 100m 높이 위에는 보는 각도에 따라 부처, 사냥매, 개 모양으로 보이는 바위가 있다.

양녕이 기일봉에서 사냥매를 날렸다는 기록은 앞에서 기술한 바 있고 현존하는 기록도 있다. 또한 양녕은 갑술생(甲戌生)으로 개띠이다. 호남사호(豪男四好)란 매, 말, 검, 기녀를 말하는데, 호남형의 양녕대군의 기질과 바위의 모습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상 언급한 지명과 천연적인 사물들이 양녕대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양녕대군이 속리산에 자주 왕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산자수려한 삼가리와 만수리 일대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사냥을 즐기셨다는 확신을 든다. 따라서 전주 이씨 양녕대군의 후손들이 이 일대를 양녕대군과 관련된 유적지로 꼽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양녕대군의 발자취를 찾아 삼가리와 만수리를 수차례 답사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기록을 살펴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18대손 병관씨(전주이씨 보은군 종친회장)는 “양녕의 유적지가 바로 이곳이다"며 확신을 갖고 있었다. 또한 “속세를 떠나 머물렀던 곳에 부처.사냥매.개 등 모두 대군의 처지와 맞아 떨어지는 사물이 있으며, 보은군내 후손들이 수백호나 된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보은군에는 전주 이씨가 320호, 이중 양녕대군파가 80호 이상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우리의 염원은 속리산 일대에 '유적비’를 세워 양녕대군의 큰 뜻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 지덕(至德)에 보은하고자 한다. 이것이 보은군에 사는 양녕대군의 후손된 도리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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