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사람들
보은 사람들
  • 편집부
  • 승인 2011.08.04 10:09
  • 호수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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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태 희

내북면 염둔리 출신/정치학박사,
부산동의대 교수 재임, 부산군민회

보은사람들은 어질고 양반기질을 가졌으며 우직하고 근면하다. 군자(君子)의 기상, 대인(大人)의 기상을 지녔다.
'보은사람들’신문을 읽으면서 보은출신 인물들을 생각해 본다.
최근 우리나라를 세계적 종주국으로 키울만한 인물이 보은에서 나온다고 예언하는 이종의 책이 출간되었다. 매우 고무적이다. 충북의 알프스와도 같은 보은은 소백산맥의 산줄기에 위치한 곳으로 정감록에 구인동어양백이라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대인이 배출될 수도 있다고 본다.

회인의 용곡이라는 곳에서 최영장군이 거주하면서 무술을 익혔다는 전설이 있다. 최영(또는 최인)장군이 이곳에서 말달리기와 무술을 연마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남 홍성 출신이라도 책이 최근 출판되었으니 의문스럽다. 최영장군은 아마도 보은에서 태어났으나 홍성으로 이주하였고 아산의 맹씨 집안에 장가갔고, 명장이 된 분으로 추측된다.

보은의 속리산은 명산이므로 예부터 많은 인물이 이곳에 은거하였다. 고려 충혜왕때 충신 김해인 금녕군 김목경, 조선 연산군때 학자 성운(成運), 최원정, 구수복 등이 이곳에 은거하였다. 옥천출신인 우암 송시열선생이 내북면 염둔리에서 살기 위해 염둔리 새터라는 곳에 집을 짓다가 뒷산이 호랑이처럼 생겨서 자손에게 불길할 것을 우려하여 청천으로 가서 집을 지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보은에서 태어난 인물 중 대표적인 분은 벽암대사, 형조판서 김정, 영의정 홍윤성, 탁지부대신 어윤중이다. 벽암대사는 사명대사 서산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고승이다.

벽암대사의 속명은 각성(覺性)이며 김해인으로 김수로왕,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고 서삼산(西三山), 삼산초등학교 인근에서 출생하였다.

하루는 술사(術士)가 와서 집터를 둘러보더니 아들을 낳으면 큰 스님을 낳을 것이라 하였다. 공의 모친 조씨(曺氏는)는 자식이 없어서 남편과 함께 북두칠성을 향해 기도하였는데, 옛날 거울의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선조임금 8년 12월에 출생하니 용모가 수미(粹美)하고 비범하였다.

공이 손에 모이를 갖고 앉아 있으면 까치가 와서 손위에서 모이를 먹었으며 한번은 공이 몇몇 사문(沙門)과 함께 밤길을 걷고 있었는데 큰 호랑이가 나타나므로 모두 놀랐으나 공은 웃으면서 “놀랬지 아우, 우리를 보호해 주려고 온 것이요"하고 호랑이와 함께 밤길을 걷다가 절 문 앞에 이르러 “이같이 멀리 바래다줘서 고맙다"하고 호랑이를 어루만져주니 호랑이는 세 번 돌아다보면서 두 번 소리치고 가버렸다. 공의 기상이 청고하며 이빨이 36개였고 눈이 동공 안에 또 하나의 동공이 있어 안광이 타인을 쏘는 듯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선수와 함께 해전에 참가하여 여러차례 무공을 세웠다. 1612년(광해임금 4) 봉은사주지로 있으면서 판선교도총섭이 되었고 1619년 청계사에서 왕을 모시고 설법하였다.

1624년(인조2)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 도총섭으로서 승군을 독려하여 3년 만에 완공하여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 대선 상의 호를 받았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의승(義僧) 3천명을 모아 항마군이라 칭하고 북산 하다가 강화가 성립되자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초서와 예서에 능했고 선교(禪敎) 양존(兩尊)과 백가서(百家書에)에 통달한 큰 학자였다. 인조 20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인산부원군 홍윤성은 회인 홍 씨이며, 1450년 문과 급제하였고 무예에 뛰어나 한성부 참군을 지내기도 하였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다.

김정의 호는 충암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중종 2년(1504) 문과에 급제하였고 보은이 낳은 개혁정치가였다. 조광조 김구(金絿), 김대유(金大有)와 함께 부패척결, 도덕정치, 향악실시, 미신타파 등을 단행하였다. 시문에 능했고, 그림도 잘 그렸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어윤중은 1848년(현종 14)에 보은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일제이고 본관은 함종이며 약우(若愚)의 아들이다. 1860년(고종6) 정시문과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였고 한말에 외교관으로 활약하였고 승지 참판을 지냈고, 1893년 양호순무사가 되어 보은의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으며, 1894년 (고종31)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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