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보은읍 교사1리, 선비의 책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도심 속 시골마을
(9)보은읍 교사1리, 선비의 책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도심 속 시골마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6.24 03:44
  • 호수 5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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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감싸 포근함 주는 태봉산은 봉화를 올렸던 안전 전망대 역할
보은향교
보은향교

#태봉산 바라보며 책 읽는 선비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도심 속 시골마을, 마을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젊은 지도자가 있다

보은향교를 품고 있는 교사1리는 태봉산 과 남산이 둘러 쌓여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교사리는 골안, 절골, 교동, 사예리, 정현리, 보촌 등 정겹게 불리던 마을을 병합하여 오늘의 교사리로 개칭하였다.
현재 교사1리는 절골, 싸리골, 골 안이라는 마을을 통합해서 동네가 길게 늘여져 있으며 필자의 눈에 비친 교사1리는 태봉산과 남산줄기가 마치 한 마리 금계가 알을 품는 듯 온화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보였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분들은 학문을 좋아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봉산은 예전 봉화를 올렸던 산으로 보은의 안전을 지켜주었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실제 6.25 전후 태봉산은 경계초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시골의 순박함이 남아 있는 선비 마을
필자가 교사1리를 답사하기 위해 조명희 (47) 이장과 통화를 하고 마을회관을 찾아가는데, 이곳도 변화의 물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몇 년 전 보았던 교사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농업고등학교에서 교사1리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이 지금은 넓게 확포장 되어있었으니 말이다. 동네를 돌아보는데 마을 입구 정자에서 어르신 네 분이 정답게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이곳에 오래 사셨나요?" 하고 여쭈어 보니 대부분 어르신들은 "아유! 뭘  그런 걸 물어보세요. 우리 마을은 남길게 없어요." 하시면서 손 사례를 치신다.
"아~네 그래요." 하며 마을의 경계를 물어 보니 어르신들이 경쟁적으로 마을의 경계를 말씀해주신다. "저기 그린 아파트 뒤쪽에서 산 능선을 따라 절골까지가 교사1리여!" 라며 손으로 가리키는 따라 눈길을 돌리며 보니 교사1리는 도심 속 시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시골의 순박했던 옛 심성들을 간직하고 있는 주민들이 보은읍 도심 옆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한편으로 아직은 보은이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싸리골 큰 샘

#겨울에도 얼지 않았다는 옻 샘, 한때는 그곳이 마을 목욕탕
"우리 마을은 옛 부터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요." 하면서 어르신들이 한분, 한분 이야기를 해주신다. "우리 마을 앞에 옻 샘이 있었어. 예전에는 옻 샘에서 빨래도 하고, 목욕도 했었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이 샘물은 얼지 않았어." "그럼 지금도 옻 샘이 있나요?"하고 질문하면서 순간 필자의 기억 속에 조선시대 까지 보은 어느 곳에 전국에서 유명했던 옻 샘이 있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 주민들이 돌을 채워 묻었다는 기록이 생각낫다.
그리고 혹시 지금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에 옻 샘의 위치를 물어 봤다. 어르신들은 "지금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마을입구 도로 어디쯤에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당시 옻 샘은 나병환자들에게 효험이 있어 전국의 환자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고 했었다. 지금이라도 샘을 찾아 발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르신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으니 "그런 건 알아서 무엇 하려고?", "아~예! 신문에 기록할 때 어르신들 이름을 올려드리려고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어르신들은 "신문에 이름 올리는 건 싫어 그러니 그런 건 묻지 말고 마을소개 글이나 잘 써줘요."라고 말하신다. 멋쩍은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있는 필자가 보던 최춘자 (81세) 어르신이 한 말씀하신다. "왜 우리 마을을 소개해준다는 사람에게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잘 써달라고 하는 거여?" 하신다. "어르신들 예전에 이곳은 어땠나요? 이곳은 냇가도 없고 살기가 불편했을 것 같은데요?" 라고 물으니 "우리 마을은 샘이 많았어, 윗마을에도 큰 샘이 있었고, 향교 쪽에도 샘이 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지."라고 답하셨다.

쌍샘

#쌍 샘이 있고 나눔의 정이 살아있는 마을
특히 아래고개 넘어 자영고 쪽으로 도치 샘이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도 약수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지 하신다.
"아~! 저도 태봉산으로 운동갈 때 입구에 있는 그 약수터를 이용하는데 그게 도치샘이었군요." 하고 되물으니, "그려! 그리고 아래고개 중간 쯤 쌍 샘이 있어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 "쌍 샘이요?" 하고 필자가 의아한 듯 물으니 한번 가보라고 하신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쌍 샘을 찾아가니 정말 신기하게도 두 개의 샘이 함께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신기했다. 필자의 생각으로 같은 장소에 두 개의 물줄기가 있어 두 개의 샘으로 사용하는 곳은 전국에서 아마 이곳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쌍 샘을 보고 다시 찾아간 마을회관에 조명희 이장이 와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젊은 분이시다. 통성명을 하고 올해 나이를 물어보니 47세이고 보은에서 제일 젊은 이장일거라고 했다.
보은군은 60대 이상의 노인인구가 30%를 넘는 초 고령사회이다. 그러다보니 40대인 이장이 오히려 신기할 뿐이다.
읍내에서 부룡합기도체육관을 운영하는 조명희 이장은 교사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교사1리는 57가구에 100여명이 살고 있으며, 75세 이상 어르신이 22가구 살고 있다고 했다.
올해 어버이날에는 코로나로 인해 부모님을 찾지 못하는 자식을 대신해 어르신들에게 떡을 해 드렸다고 했다.
조명희 이장은 마을어르신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아래고개 넘어 있는 작은 공터에 꽃밭을 가꾸려고 여러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꽃밭은 마을주민뿐만 아니라 교사리를 찾아오는 외지인들에게도 우리 마을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떻게 젊은 이장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은 어르신들에게 기로연이란 것을 베풀었다. 이것은 60세가 넘은 태조가 한양 천도 후 나이 많은 관료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후 나이 많은 전 현직 관료들에게 연회를 베푼 것이 유래가 되어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가 되었다고 한다.
교사리는 옛 부터 선비마을이라고 했다. 이번 어르신들에게 떡과 카네이션을 달아 주신 것은 어쩌면 옛 부터 내려오는 선비정신이 이어오는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향교에서 내려오는 예절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웠을 테니 어르신들을 생각하는 이장님의 마음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닌 것 같다.

향교 앞 거목

#효를 아는 향교마을 교사리
고갯길을 걸으며 쌍 샘도 구경하고, 코로나 때문에 오고 싶어도 찾아오지 못하는 자식들을 대신해 기로 떡 나눔과 카네이션을 달아주신 것을 생각하며 향교로 향했다.
걷다보니 어느덧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 옆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고 그 아래 향교를 지켰던 전교들의 공헌비가 보인다.
공헌비를 보며 이들이 살았던 시절은 어떤 형태의 보은이었을까 하는 궁금해졌다.
향교를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만난 최춘자 어르신에게 마을 유래비에 대해 물었다.
아랫마을 입구에 마을 유래가 잘 기록되어 있다고 하신 최춘자 어르신은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시면서 필자의 발걸음을 잡는다. "집에 가서 생각해 보니 생각나는 게 있네요. 이것도 마을소개 글에 넣어 주셔요." "어떤 건가요?" 하고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니 "윗동네에 가면 송고개가 있어요. 옛 날엔 그곳으로 춘소골을 넘나들었어요. 그곳에 큰 정자나무가 있답니다." 하신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최춘자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향교 발전을 위해 어느 군수가 세운 비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향교 마을에 남풍이 불어온다
마을 유래비에 교사리는 조선 세종 때 경향각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글 읽는 소리로 날이 새고 묵향에 밤이 깊었다는 전설이 깃든 마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향교는 조선 세종 때 창건되어 공자와 5성10철 송조4현 외 18현의 위폐를 봉안하고 있으며 1964년까지 한문선생을 임용하여 전통계승과 한학보급에 힘써왔다고 한다.
지금의 향교는 조선말 서원 철폐령이 내려 졌을 때 상현서원 강당을 향교의 명륜당으로 이축하였다고 한다.
옛 것을 지키면서 현대를 조화해 내는 것 또한 마을의 자랑이라고 쓰여 있는 교사1리 마을자랑비의 끝말을 보니 1993년 11월 10일 어느 선비의 고견이 필자의 가슴을 울리는 듯하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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