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을 공터에 방치된 빨간 동력경운기
(9) 마을 공터에 방치된 빨간 동력경운기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5.27 09:35
  • 호수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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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근대화의 주역 동력경운기가 동네공터의 흉물이 되다
1973년 처음으로 대동의 경운기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다가 최근에 트렉터로 교체했다는 보은읍 산성리 이재하 어른신의 빨간 경운기.
1973년 처음으로 대동의 경운기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다가 최근에 트렉터로 교체했다는 보은읍 산성리 이재하 어른신의 빨간 경운기.

요즈음 농촌마을을 들어가면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다.  동구 밖이나 동네 공터에서 비바람을 맞아 빨갛게 녹슬어 방치된 처량한 경운기의 모습이다. 1970년 농촌새마을운동과 함께 농촌근대화의 주역으로,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간 텅 빈 농촌에서 당당히 농촌을 지켜낸 훌륭한 역군의 모습치고는 너무도 처량한 신세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주 '우리동네 문화유산'에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동력경운기를 테마로 이야기를 전개해보겠다.
동력경운기(動力耕耘機)는 1920년에 호주의 클리포드 하워드가 개발하여 1950년경 일본으로 들어가 위력을 떨치다가, 보은에는 1966년도에 당시 보은농업고등학교에 실습용으로 들어와 학생들의 호기심을 독차지했었다.
경운기의 생산은 옥천에 있는 국제종합기계를 비롯해 대동공업, 아세아기계에서 대량 생산에 들어가 6마력에 3단 기어, 속도 20㎞에 휠을 돌려 수동으로 시동을 걸던 경운기는 점차 총 8단 기어에 8-10마력, 속도 30㎞에 키박스까지 달아 열쇠로 시동을 거는 발전을 거듭하여 큰 고장 없이 20년 이상을 사용했다. 1970년 초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은 신라 지증왕 502년에 널리 보급된 우경법(牛耕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와 사람의 노동에 모두 의존하고 있었으나, 경운기는 소를 대신하여 후방에 트레일러를 달아 구루마를 대신하였고, 쟁기를 달아 논밭을 갈고, 이앙기를 달아 모를 심었다. 또 폴리에 벨트를 걸어 탈곡을 하고, 물을 푸고, 동력분무기로 농약을 뿌리면서 1천500년간 이어져온 소의 고달팠던 노동을 해방시켜 주고, 당당히 농업동력화의 주역이 되었다.
1973년 처음으로 대동의 경운기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다가 최근에 트랙터로 교체했다는 보은읍 산성리의 이재하(75) 어르신은 "경운기요 ? 보물이지요. 당시 동네마다 젊은이들이 다 도시로 나가고 농촌이 텅 비었는데 경운기가 살려냈어요. 아마 당시에 경운기가 없었다면 우리농촌은 다 무너졌지요. 상일꾼 10명 몫을 했어요"라고 옛날을 회상했다.
바닷가에 떠 있는 어선이 어촌을 표시하듯, 경운기는 농촌을 표시하는 상징물이었다. 요즘도 간혹 농촌을 상징하는 예능프로에서 출연자들이 경운기를 타는 장면이 보이지만, 전에는 장날마다 비료나 생필품을 잔뜩 사가지고 오는 동네사람들까지 태우고 탕탕거리며 마을버스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1990년에는 보은의 용감한 청년들이 경운기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겠다고 보은-제천-인제-설악산-정선-단양-예천을 경운기 한 대로 누빈 일이 MBC의 '이야기 속으로'에서 방영돼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운행하다보니 선천적으로 거칠게 태어난 경운기는 전복사고와 함께 일반 차량과의 충돌, 트레일러에 타고 있던 사람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경운기를 운전하던 고령이 농민이 운전 부주의로 경운기 앞부분(머리)에 깔려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농기계의 발달로 짐 운반은 농사용 트럭에게, 논밭을 갈고 로타리 치는 일은 트랙터에게, 모를 심는 일은 이앙기에게, 수확은 콤바인에게 내어주면서 사용할 일이 없어진 경운기는 동구 밖이나 동네 공터에서 비바람에 시달려 온몸에 빨간 녹물을 뒤집어쓰고, 옛날의 영화를 되새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간혹 아직도 농약을 뿌리거나, 물을 끌어 올리거나 가벼운 짐을 나르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과거 농업, 농촌, 농민에게 최대의 쓰임을 해왔으나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동력경운기. 고물 그리고 흉물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용광로에 넣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동력경운기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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