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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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5.27 09:32
  • 호수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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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 생 호
(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강산리

아무리 높은 곳의 물도 아래로 흘러내린다. 바다로 가기 위함이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행기도 안전하게 내려앉는 게 가장 중요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산을 오르는 것도 결국엔 내려가는 걸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산은 오를 때 보다 내려올 때 더 겸손하고 조심해야 한다.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튼실한 열매를 맺었던 나무들도 겨울이 오기 전 미련 없이 몸 안에 물을 땅속으로 내려보낸다. 다음 해 더 크고 우람한 가지와 줄기를 뻗기 위한 선택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사람의 일생은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앞만 보고 질주한다. 위로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뭔가를 위해 쉼 없이 움직이고 매달린다. 그러다 결국, 멈추거나 내려가면 패배자나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억눌림에 힘겨워한다. 타의에 의해 규정되고 끌려다녔던 그 시간과 노력이 스스로를 옥죄었다. 신기루를 쫓아 자신만의 길을 잃은 채 떠돌지는 않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렇게 한 시절이 가고 한 시대가 저물며, 한 생애가 잠든다. 
잡으려 하고 오르고자 했던 많은 것들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삶의 이치임을 알고 있지만 무언가를 내려놓기가 두렵고 억울하다. 사람의 일은 남보다 앞서가며 높이 오르고 가득 채우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일인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일등만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더 많이 가진 사람만을 바라보며 내 달린다. '아흔아홉 마지기 논을 가진 사람이 백 마지기를 채우기 위해 한 마지기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다'는 속담의 의미를 더 절절하게 보게 되는 요즘이다. 
명예와 권위를 위한 자리다툼도 마찬가지다. 한 계단을 오르면 더 높고 넓은 무대가 펼쳐지며 부질없는 욕망을 부채질한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과 결과를 끝없는 도전과 노력, 성공과 출세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미화하며 추켜세운다. 대단한 업적이고 성과임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렇게 앞서가고 채워가며 올라가는 시간과 과정들에 진부한 물음을 던진다. 그 모든 일들이 과연 공정하고 평등하며 정의로웠는가?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과 약육강식의 왜곡된 질서 속에서 부딪치고 넘어지면서도 뒤돌아보거나 숨 고르기는 사치요 나약함의 다른 이름으로 치부되었다. 함께 나누고 공유하며 더불어 사는 삶은 생존경쟁에 내몰린 정글 같은 세상에서 종교적 신념이나 극도의 선량한 삶을 추구하는 일부의 미담으로 알려질 뿐이었다. 
너무 높이 오르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잊은 채 밀랍으로 된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다 결국엔 밀랍이 녹아버려 떨어져 죽은 이카루스의 날개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을 상징한다.
앞서서 올라가고 채울 줄만 알았다. 때론 뒤에 있거나 내려가며 비워낼 줄 몰랐다. 
뒤를 돌아보면서 지나온 발걸음이 올바른 길이였는지, 남겨진 발자국이 부끄럽지 않은 징표인지 수시로 되새겨 보는걸 가르쳐 주면 좋겠다. 옆을 보며 함께 가는 사람이 힘들 땐 버팀목이 되고, 더위에 지칠 땐 그늘이 되며, 비가 올 땐 우산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간절히 일러 주면 좋겠다. 아래를 보면서 내가 손 내밀어 끌어줘야 할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늘 살피고 관심 가지는 일이 참되고 의미 있는 삶이란 걸 깨우쳐 주는 어른이 있으면 좋겠다. 
내려오지 않을 수 있는 건 없다. 내려놓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언제 내려오고 어떻게 내려오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공은 바닥에 닿아야 튀어 오른다'고 했다. 이왕 내려가고 내려놓을 거라면 그나마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조금씩 비우고 덜어내는 것은 어떨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 한 구절의 울림은 크다. 
그 누구나 마지막 순간엔 모든 걸 내려놓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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