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소띠 해 특집] 80년 해로한 이기종(97)·이오행(96) 부부
[신축년 소띠 해 특집] 80년 해로한 이기종(97)·이오행(96) 부부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1.01.28 11:47
  • 호수 5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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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를 눈앞에 둔 지금도 두 손 꼭 잡고 시장 동반 나들이하는 금술 자랑
서로 아끼고, 위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80년을 해로하고 있는 금술좋은 이기종·이오행 부부. 모든 걸 함께 하니까 표정에서 부터 편안함이 느껴진다.

"우리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같이 갑시다."
탄부면 벽지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안을 걷고 아침식사를 손수 차려놓고 할머니를 깨우는 이시대의 애처가인 소 띠 이기종(97) 할아버지가 제안한다.
수시로 거울을 보며 얼굴을 보고 머리를 만지고 할아버지의 옷깃을 펼쳐주며 옷매무새를 잡아주는 이오행(96) 할머니의 대답은 "당신 하자는 대로 할게요."라고 답한다.
할아버지 17살 때 중매로 1살 어린 16살의 할머니를 만나 무려 80년을 함께 보냈다.
"지금도 할아버지 사랑하세요?"
"그럼 사랑하지, 사랑해."
"저 분(할머니, 즉 부인)은 참 고마운 분이야. 없는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 참 많았지…"라고 하신다.
순도 100%의 청정 다큐와 같은 80년의 세월. 금이좋은 노부부의 소탈하지만 아름다운 일상을 지면에 담는다.

산해진미가 이보다 더 맛있을까. 금술좋은 부부가 매일 겸상해 음식을 먹으니 먹는 것이 모두 보약이 된다.

#"일어나요 밥 먹읍시다"
새벽 5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갈하게 갠 후 이기종옹이 하는 일은 운동이다. 요즘같은 추운 겨울엔 밖에 나가지 못해 집안을 걷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늙었다고 가만히 있으면 몸이 굳으니까 자꾸 움직여야 해. 그래야 온몸 구석구석 혈액이 순환되고 몸에 열도 나고 밤새 잃었던 입맛도 돌아오지."
취미로 즐긴 바둑 프로그램도 보고 뉴스도 보고 몸을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7시가 된다. 이기종옹은 밥을 푸고 찌개도 데워 아침상을 차린 후 부인을 깨운다. 부인을 깨우는 대사는 이렇다. "일어나요, 밥 먹읍시다."
요양보호사가 차리는 점심상을 빼고 아침과 저녁은 몸이 불편한 부인을 대신해 상을 차리는 것이 꽤 오래됐다.  80년 해로하는 동안 수십년을 자신을 위해 상 차린 부인을 위해 이제라도 상을 차리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노구이지만 기꺼이 수저를 놓는 것이다. 
음식솜씨가 아주 좋았던 부인이 이제는 자신의 수발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 안타깝지만 밥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면 그나마 안도한다.
아침상을 물린 부인은 고운 얼굴을 다듬으며 미모를 가꾼다. 침대머리 맡에 작은 손거울을 두고 수시로 보며 혹시 흐트러진 데가 없는지 살핀다. 96세의 노인이지만 남편에게 여자이고 싶은 심정이 깔려 있는 듯이 보인다. 남편의 옷깃이 접혀 있는 것을 보면 손수 펴준다.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 편한 차림으로 있는데도 옷매무새를 고쳐준다. 노부부의 사랑이 뚝뚝 떨어진다.

#혼자안두고 꼭 같이 나가지
이들 부부는 종종 외출을 한다.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도 가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종종 보은행 버스를 탄다. 이기종옹 97세, 이오행 할머니 96세로 고령이지만 외모로만 보면 그 연세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훨씬 젊어 보인다. 모두 지팡이를 짚는 것 외에는 거동에도 불편함이 없으니 외출에 부담이 없다. 축협 한우이야기, 신라식당, 즐거운집, 중국집 등 단골 식당에서 불고기, 한식, 청국장, 짜장면 등 매운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은 뒤로하고 매운 것을 싫어하는 부인의 식성에 맞는 음식으로 점심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동반외출은 아주 오래됐어. 내가 나갈 일이 있으면 꼭 같이 나가. 집에 혼자 안둬. 귀찮아하지 않고 나를 잘 따라 나서니까 좋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이기종 옹은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고 그런 남편 눈을 마주치는 부인에게서 서로 믿음과 사랑이 느껴진다.
이들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이다. 경북 화북면 장암리에 사는 큰 매형이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유공자 이성범 선생의 손녀인 이오행님을 이기종 옹과 중매한 것이다. 이기종옹 17살, 이오행님은 16살인 꽃다운 나이다.
5대 종손으로 일찌감치 철이 들었던 이기종옹은 이오행님을 부인으로 맞으면서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그 당시 농사지으면 약탈해가는 친일파가 득세하고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2남2녀 중 장남에다 4대가 함께 사는 층층시하에, 가난한 집 제사 자주 돌아온다는 속담처럼 1년이면 제사만 명절 합해 열 번을 지내는 집이었다. 그런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80년을 해로하니 그 정이 더욱 애틋한 것이다.

#가난한 집 5대 종손, 동생 돌보는 것도 장남 몫
가난하지만 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덕분에 이기종옹은 여덟 살 됐을 때 관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벽지리에서는 초등학교를 다닌 유일한 사람이다. 집에서 관기초등학교까지 멀고 또 삼가천이라는 큰 하천을 건너야 했지만 학교를 다닌다는 즐거움에 힘든 것도 몰랐다. 중학교를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부모님과 함께 담배농사를 지었다.
20대 초반에는 땅 3천평이 나왔는데 쌀 10가마가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고 쌀 10가마(당시 600만원 상당)를 빌려서 땅을 샀던 배포 큰 청년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80㎏)에 대한 이자가 닷 말(40㎏), 그러니까 이자가 50%인 고리대금이지만 이기종옹은 과감하게 결정했고, 빚을 갚느라 고생은 했지만 당당히 토지문서를 손위 쥐며 가난한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다.
27살에 군에 입대해 제대하고 집에 와보니 중학교 졸업 후 장래희망은 꿈도 꾸지 못하고 꺼칠해져 있는 막내동생이 눈에 밟혔다. 자신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던 것을 생각하고 고등학교 가겠느냐는 물음에 뛸 듯이 기뻐하는 동생을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 운동을 좋아했던 특기를 살려 동생 희망대로 유도대학교를 보냈다. 대학교 졸업까지 마칠 수 있었으나 1학년을 마친 후 군대에 간 동생은 이후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 결국은 학사모를 쓰지 못했다.
"나랑 상의를 안하고 저 가르쳤던 선생님과 상의를 하고 덜컥 군대를 가버렸지" 이기종옹은 동생이 끝내 학사모를 쓰지 못은 것을 내심 서운해 하는 표정이다.

장남 이국현, 송명숙부부, 그리고 장손자와 둘째손자 부부 또 증손자들이 탄부면 벽지리 이기종옹 이오행 부부를 찾아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 엿보인다.

#점방, 우마차, 연탄 판매, 벼타작…사업가 기질 다분
1950년대 중후반 농사만으로는 4대가 먹고살기도 힘든데 자식들 가르치는 것은 더더욱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이기종옹이 대안으로 찾은 것이 점방이다. 
탄부는 5일장이 서던 당우리에 점방이 있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학교 앞이나 시장, 삼거리, 사거리 등 왕래하는 사람이 많았던 곳에 있었던 것이 보통. 이기종옹은 고정관념을 깨고 벽지 마을 안에 점방을 차렸다. 
여러 동네가 거쳐가는 교통요충지도 아니고 동네사람들만 보고 장사를 해야 하는 여건이었지만 장사가 아주 잘됐다. 소문이 나서 인근 덕동에서도 이 점방을 찾았다. 이기종옹은 한발 더 나아가 연탄을 팔았다. 나무를 때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겨울철 물을 데우고 소죽을 쓰던 시절에 동네 2, 3집에서 사용하는 연탄까지 판 것이다. 처음엔 무연탄을 팔았다. 
밑불을 지핀 아궁이에 흙과 물을 넣고 갠 무연탄을 넣어 난방을 하고 물을 끓였다. 이후에는 19공탄 찍는 틀을 사서 19공탄을 찍어 팔았다. 우마차도 운행했다. 
황소에 멍에를 얹어 구루마와 연결, 짐을 실어나르며 운임비를 받았는데, 보은장, 관기장, 원암장(현 원남장), 청산장까지 갔다.
건설사를 운영하는 이기종옹의 장남 이국현(71)씨는 "나 어렸을적 우마차를 타고 보은장에도 갔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탈곡 사업도 했다. 콤바인이 나오기 전 발동기로 탈곡기를 돌려 벼타작을 했다 탈곡기가 많지 않던 시절이고 작업도 더디니 집집마다 타작하다보면 늦은 밤이 돼야 일을 마치기 일쑤였다.
1950, 60년대 형편이 부유한 집안도 아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가난을 탈피할 돌파구로 찾은 이같은 일은 따져보면 지금과 비교하면 점방은 마트였고, 연탄장사는 연탄공장 및 직매장이었고 우마차는 화물 운수업이었고, 발동기와 탈곡기는 콤바인으로 벼 타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당시엔 아주 큰 사업체를 여러개 운영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구에게 사업을 배운 것도 아닌데 일찌감치 사업 쪽으로 머리가 깨인 이기종옹 덕분에 슬하의 2남4녀 자녀들은 고등교육까지 전부 배울 수 있었다. 아들 욕심에 자식은 많이 나았는데 농사를 지어도 입에 풀칠하기 바쁘니 자식 가르치는 것은 가난한 집은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일이었던 시절엔 장남만 겨우 가르치거나 아니면 장남이 아래 남동생에게 양보하고 여자들은 오빠나 남동생에게 치여 아예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거나 초등학교 3, 4학년 다니다 그만둬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대단했던 때였다. 
가정형편이 좋은 집안이어야 딸들도 중학교를 보냈던 시절에 이기종옹은 아들, 딸 차별하지 않고 당시 시골에서는 최고의 고등교육까지 모두 가르쳤다.
"내가 장사를 한 것은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고 내 생각에 그렇게하면 돈이 생기지않을까 해서 한 것인데 다행히 잘 됐지. 그 덕분에 막내동생도 대학교에 보낼 수 있었지. 나는 돈 버는데 온 신경이 서 있었고 저 분은 자식키우며 집안 돌보랴 애를 많이 썼어. 참 고맙지"
97세 이기종옹은 부인을 가리켜 '저 분'이라고 했다. 보통 '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호칭으로 부인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부부애를 넘어 존경까지 담긴 부부사이를 본받은 슬하의 2남4녀의 자녀들은 이기종옹의 친손, 친증손, 외손, 외증손까지 대동해 호호할아버지, 호호할머니를 자주 찾아와 안부를 살피고 통화를 하는 등 화목하고 효성스러운 대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업가 기질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게 어려웠던 시절 장사로 가정경제를 일군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6대 종손, 장남 이국현씨는 서울에서 건설업을 하는 바쁜 와중에도 부인과 수시로 찾아와 부모의 안위를 살피고 식사를 챙긴다.
자주 오는 큰 아들 내외이지만 다시 발길을 돌리면 두 눈엔 아쉬움이 그득하다. 장남과 며느리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본다. 노부부는 언제 볼지하며 또다시 그리움을 담는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부모, 형제간의 정을 나눴던 설 명절을 다가온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펴드려야 할 노부모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제나 저제나 자식, 손주들을 볼 수 있을까 먼데 하늘을 바라보고 계실 부모님을 떠올리면 가슴 먹먹해진다. 
전화기 넘어 들리는 자식, 손주의 목소리에 부모님은 또 며칠 살 수 있는 기운을 얻는다. 이기종옹과 이오행 어르신을 보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추억해본 시간이었다.

이국현, 송명숙 부부가 부모님이 좋아하는 불고기를 대접하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가 대접하는 음식을 맛있게 들고있는 이기종옹과 이오행 부부.
부모님 생신은 슬하의 자녀들이 다 모이는 날. 이기종, 이오행 부부의 2남4녀와 그의 사위 며느리, 그리고 동생들 가족까지 한자리에 모여 기쁜날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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