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맞습니다'
'본인 맞습니다'
  • 편집부
  • 승인 2011.07.21 10:38
  • 호수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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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수필가, 보은 이평)

인감증명이 급히 필요해서 읍사무소 민원실을 찾았다. 운전면허증 속의 사진과 컴퓨터 모니터와 내 얼굴을 번갈아 대조해보던 담당직원은 미심쩍은 듯 “본인 맞으세요?"하고 묻는다. “네! 맞아요. 머리 길이가 짧아졌어요!" 나의 대답만으로는 확신이 서질 않는지 다른 신분증을 요구하며 머뭇거리자 옆자리의 직원까지 슬그머니 다가와서 천천히 내 얼굴을 살핀다. 나보다 늦게 오신 선생님은 벌써 신청한 서류를 건네받으셨는데 낯은 익지만 친분이 없으니 증인을 부탁드릴 수도 없고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서 있었다. 그런데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이 상황이 재미있게 여겨졌다. 서류 속에 존재하는 확실한 나를 따돌리고 실제의 내가 감쪽같이 변해 버렸다니...... 거미줄처럼 휘감고 있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은 무소속의 해방감을 잠깐 느껴보았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신분증 속 십년 전 사진과 거울에 비친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 본다. 그러나 머리 모양은 달라진 여러 가지 중 하나 일 뿐, 덤덤하고 메말라 보이는 표정이 우선 눈에 들어와 “본인 맞으세요?"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들쑥날쑥하긴 해도 현실에 감사하며 고스란히 세월에 순응하는 나는 인상도 따라서 점점 온화해지리라 여겼다. 한 해 두 해 쌓이는 연륜만큼 깊이 있는 표정이 군데군데 풍성하게 스며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부대끼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리라 막연히 믿고 있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일치해야 발급되는 인감증명처럼 어제 오늘 또 내일이 보기 좋게 맞물리고 있는지 가끔은 자아증명도 신청을 해야겠다.

얼마 전 한 보험회사에서 나이가 얼마나 돼야 노인으로 볼 수 있을지, 40~69세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았다. 54.4%가 70~74세, 14.4%가 75세가 넘어야 노인으로 본다는 응답이 나왔다. 다행스럽게 조사대상이 20~30대 층이 아니라 내가 그 대열에 들어서려면 강산이 두어 번 변할 만큼의 여유가 있다. 그런데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실제 자신의 나이보다 36.9%가 6~10세, 16.6%가 열 살 넘게 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 역시 50%가 넘는 착각군에 속하지만 일상에서 부딪히는 불편함은 늘어간다. 좀 오래 앉아 있다 일어서려면 허리가 곧바로 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엉거주춤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민망하지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허리를 곧추세우며 딸아이에게 “자! 지금부터 직립보행을 위한 진화가 시작됩니다!"라며 웃음으로 묻어버린다.

오래전부터 나와 절친인 건망증은 단기적인 집중력과 맞물려 점점 세를 불린다. 커피를 마시고 남은 찻주전자의 끓는 물에 행주를 소독한다고 넣었다가 그 물로 몇 차례 더 커피를 마시고, 두 봉에 오천 원을 주었단 말을 거두절미하고 오봉지로 발음하는가 하면 돌돌말린 치약을 말끔히 쓰고 버리려다 몇 번 이를 문지른 후 무좀연고임을 알았다. 진간장에 사은품으로 붙어있는  간장은 당연히 진간장으로 알고 조림간장이라는 글씨가 분명 눈에 들어와도 마음속은 조림간장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기존의 틀에 익숙해진 편안함에서 한 번 더 머리를 써야하는 것이 어렵고 정말 싫다. 잡다한 일이야 한꺼번에 몇 가지씩 처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두 가지 이상 일이 겹치면 한 가지는 실패율이 요즈음의 수은주다. 깜빡하다가도 뒤늦게 생각이 떠오르면 다행인데 그냥 까맣게 잊고 넘어가 버린다. 그 중 음식 태우는 일이 잦아져서 피해자 중 한 명이 요리 도구인 타이머를 싱크대 위에 부착해 주었다. 예약한 시간에 정확히 삐~삐~삐~ 경각심을 울려주니 참으로 유용하다. 

며칠 전에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부인과 그를 지켜보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아름답지만 쓸쓸한 내용의 “어웨이 프롬 허"라는 영화를 보았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여주인공 피오나는 집을 찾지 못해 추위 속에 고립될 만큼 병이 깊어졌다. 남편의 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짐을 지우기 싫어 요양원을 택한다. 드디어 피오나가 입원하는 날 사십오 년을 함께한 노부부는 이별의식으로 사랑을 나누고 아픔을 삭이며 헤어진다. 오래잖아 피오나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고 입원한 남자 환자에게 온갖 정성을 쏟으며 마음을 준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그랜트(남편)는 피오나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자신의 능력 밖이라 달리 도리가 없다. 피오나의 행복한 모습을 찾아주기 위해 옛 남자친구와 동행했던 그랜트를 뜻밖에 기억하고 행복한 포옹을 나누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노배우들의 허무하고 진중한 연기는 사실적이고도 경건했다. 여주인공은 관조하는 편안함으로 멀어지는 기억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긍정하는 눈빛은 집착을 비워 맑게 빛났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나온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오리무중의 짙은 안개 속을 홀로 떠다닌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슬프고 두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불행을 비켜가겠지만 또 누구에게는 닥칠 일이기에 영화 속의 아름답지만 서럽고 고독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았다. 자신은 물론 주변의 인연까지 팽개치는 가혹한 삶이지만 어찌해 볼 방법도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 위안이 필요하다면 역시 사랑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다. 주위의 한 사람이라도 병든 이에게 사랑의 손길을 끝까지 보낸다면 그 삶은 결코 비참하지도 헛되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 곁의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더 공을 들여야 할 이유를 한 가지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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