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나를 구원하였네"
"사랑이 나를 구원하였네"
  • 김경희 시민기자
  • 승인 2020.07.09 11:01
  • 호수 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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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여워라
나는 핏덩이인 채로 부산역 앞에 버려졌다. 내 팔목에 볼펜으로 생년월일이 적혀있었다 한다. 보로박스 안에 애기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한 누군가의 손에 거둬져 경찰서에서 하루 자고 근처 고아원에 보내졌다. 전쟁 후 물자도 부족하고 사방천지에서 몰려든 타지 사람들이 얽혀서 찐하게 살아가는 자갈치시장 부근 어느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더 없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계신 이화자 어르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더 없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계신 이화자 어르신.

 

척박한 유년이었지만 불우하지 않았다
나는 100명도 넘는 아이들과 같이 15살이 되도록 살았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고달팠다. 넉넉하지 못한 시절이라 공부보다도 먹을 것이 더 귀하고 급했던 시절이다. 그래도 국민학교 1학년 수준의 공부를 배우기는 배웠다. 
자갈치시장 아래 넓은 모래사장에서 고아원 아이들과 놀고 있으면 군인들이 군용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차를 보면 신이 나서 가까이 달려가서 그 군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릴 때 차를 보면 마음이 뛰었다. 그 차를 타고 어디든 멀리멀리 가고 싶었다. 다 크도록 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군인들이 차에서 내려 건빵하고 분유를 주어서 우리들은 다 같이 얻어먹었다. 남에게 얻어먹었다고 혼을 내면서 반장이 싸리꼬쟁이로 우리들을 때렸다. 반장은 군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말라고도 했다. 군인 중 한 명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서 이뻐서 준 거니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지만 반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수시로 구타했다. 그 때 맞은 다리로 인해 지금도 나는 다리를 절룩거린다.  

내 나이는 15살이 되던 해, 나는 소녀에서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다. 얼굴이 이뻐서 고아원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친구들과 고무줄놀이, 공기놀이하면서 재미는 있었다. 다 같이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맞기도 많이 맞았다. 고아원 반장은 날이면 날마다 괴롭혀 맞는 것이 지겨워 도망 나왔다. 도망 후 다리 밑에서 생활하였다. 지금 돌아보면 각박하게 살아 온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달콤달콤 키다리아저씨와 연애
가끔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마음으로만 꾹꾹 누르고 내색하지 않았다. 다리 밑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군인아저씨가 건빵과 분유를 나에게 따로 잔뜩 주더라. 다음 날에는 과자를 한 아름 받았다. 군인아저씨는 따로 나를 불러 다른 아이들과 나눠 먹지 말고 혼자서만 먹으라고 당부했다. 운전병 아저씨는 지나갈 때마다 호루라기를 불기로 했다. 호루라기는 우리 둘만 아는 신호였다. 군인아저씨가 말년 휴가를 나올 때 나에게 속리산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해서 따라갔다. 부산 바닷가 근처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산이라는 곳을 보았다. 웅장하고 깊었던 속리산의 한 식당에서 청춘남녀가 모였다. 주인이 가마솥으로 시래기 된장국을 끓여주었는데 참 맛있었다.

속리산 구경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않았다
오갈 데 없는 나에게 소 키우는 집에서 20만원 준다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들어 가 뼈 빠지게 일을 했다. 그러나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그 집에서 쫓겨 나오다시피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속리산 구경 시켜 준다던 군인과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속전속결이었다. 소꿉놀이 같은 어설픈 결혼생활이었다.
제대할 즈음 군인아저씨는 고아원을 찾아가서 원장님께 실컷 혼나고 '잘 살아라' 하고는 원장님은 나를 내보내 주었다. 나중에 원장님이 보은 집까지 찾아와서 잘 사나 확인하고 가셨고, 4년 후 시어머니 초상 때 연락하니 원장님이 문상도 오셨다. 그곳이 나의 친정인 셈이다.

준비도 없이 남편과 이별이라니
6남매 중 둘째인 남편의 보은 시가에서 시부모와 증조부모와 다 같이 살았다. 나는 산에서 해온 나무와 보릿짚으로 불 때고, 보리를 쪄서 보리쌀로 가마솥 밥을 하면 노인들이 고봉밥으로 맛있게 드셨던 것도 추억이다. 그때는 먹을 게 없어서 그렇게 가득 먹었을 것이다. 나는 16살에 큰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큰아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젖도 한 번 물리지 못한 체 시어머니와 남편이 큰집으로 아들을 보냈다. 엄청 울었다. 3살 터울로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을 보았다. 집안일은 고되었지만 내게도 가족이 있으니 너무 행복했다.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험 쳐서 보은군청 건설과에 임용돼서 근무했다. 필적이 좋았으며 근무도 잘했고 대인관계도 좋았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있는데 술 한잔하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가다 저녁 8시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38살, 너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인해 모두 놀랐고 안타까워했다. 군청에서 직원들이 찾아오고 장례비도 나왔다.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내 아들 죽였다는 소리부터 시어머니의 구박은 명절에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부침개도 못한다고 갑자기 물을 몸에 붓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 땐 눈물이 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갈 데도 없고 애들은 어렸기에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등에 업고 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악착같이 일했다. 동네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를 친정어머니라 생각하고 담배와 옷을 사드리면서 우리 애들 깨워서 학교에 보내 달라고 부탁도 하기도 했다. 남편 보내고 5년 후에 할머니도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러드렸다. 양자로 보낸 아들이 무엇을 하는 지 소식은 없지만 둘째로 태어 난 아들은 청주대학교 졸업하고 경찰과 우체국 동시에 합격했다. 자랑스러웠다. 우체국이 나을 것 같아 우체국으로 가라고 했다. 막내는 보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 배워서 조선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흙사랑학교 이야기
아는 사람이 이야기해서 2019년부터 다녔다. 아무 것도 모르면 창피스럽고 해서 배워야 한다. 나는 젊은 사람이라 배우는 게 빠르다. 6년 전부터 주택부금 넣어서 보은임대아파트에 당첨되어 살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아침에 주공아파트에서 아침 9~11시까지 일주일에 5일 근무하는데 주차스티커 붙이는 작업을 하면서 월 40만원을 벌고 있다. 게다가 노령연금 30만 원도 받기 시작했다. 관리비 내고 쌀은 정부에서 나오고 보은복지관에서 일주일에 두 번 반찬도 배달해 준다. 전동차를 타고 다니지만 공부하고 싶어서 2층 교실까지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올라온다. 전동차도 200만원하는데 차상위계층이라 15만원만 지불하고 샀다. 내년에 60만원을 받는 영세민으로 해주겠다고 사회복지사가 약속했는데 정부의 도움도 좋지만 수급자로 사는 것보다 힘껏 움직여서 40만원이라도 벌면서 되도록 내 힘으로 살겠다. 

이만하면 되었다. 참말로 기적 같은 인생이다. 핏덩이로 버려져 15살까지 고아원에서 생활, 첫아들을 내 뜻과는 상관없이 큰집 양아들을 보내 가슴은 아프지만, 아들 둘을 내 혈육이라 부를 수 있어 행복하다. 학교도 다니고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며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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