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6.04 09:30
  • 호수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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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 생 호
(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강산리)

보이지 않는 소리의 힘은 아득한 그리움이요, 깊은 울림이다.
눈 감고 들으면 더 크고 강한 힘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마음에 간직된 소리들은 수시로 찾아 들어 추억의 이름들을 불러낸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 소리들이 있어 더 많이 보고 싶고, 찾고 싶고, 가고 싶어진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소리들을 찾아본다. 먼 옛적, 어머니의 자장가와 할머니의 손주 사랑이 듬뿍 담긴 구성진 이야기가 들린다. 해질 녘까지 온 동네를 휘저으며 뛰 놀다 보면 어느 덧 해가 지고 여기저기서 다양한 발성과 톤으로 어서 들어오라 부르시던 엄마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모성애의 진한 감성으로 메아리 쳤다.
농사철 일손이 분주 할수록 새참은 거하고 인심은 후했다. 지나가는 길손이라면 누구라도 불러 앉혀 막걸리 한 사발 함께 들이켜야 했다. 그 소리는 인정의 발로였다. 새벽 닭 울음소리는 잠든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우렁찬 종소리였고, 해마다 예닐곱 번은 들리던 아이의 힘찬 첫 울음 소리는 온 마을의 경사였다. 겨울 밤 길게 울리던 찹쌀떡 장수의 일정한 음률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때론, 들리지 않는 소리에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풀이 자라는 소리, 나무가 커가는 소리, 그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소리,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흘러가는 구름이 전하는 소소한 소리, 달도 기운 밤하늘에 초롱초롱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내는 동화 같은 이야기, 아프고,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몸과 마음을 터놓고 위로 받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웃들의 속 풀이 하는 소리, 주변의 사소한 것들이 전하고자 하는 그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때 삶은 더 값지고 풍요로워 질 것이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농부가 매일 같이 밭으로 나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얼마나 목이 마른지, 뭘 먹고 싶어 하는 지, 괴롭히는 건 없는 지, 작물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어미의 마음이 되어 보살피는 것이다.
봄이 오면 논에서 개구리들이 합창을 하고, 여름이면 기나긴 애벌레의 시간을 한 풀이 하듯 나무 가지에 매달려 세차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소음이 아닌 시절이 그립다. 가을 창 밖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사색의 밤을 불러온다. 겨울밤 내리는 함박눈은 소리가 없다. 소리가 없어 더 포근하고 순수했다. 계절을 가림 없이 바람 부는 날이면 들려오는 풍경소리는 누군가를 부르는 그리움의 소리다.
일정한 시간, 정해진 길을 따라 일터로 향하는 시간에 만나는 새들의 다양한 노래 소리는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행진곡이다.
이름과 지명만 대면 관련된 모든 것을 줄줄이 풀어 놓으시던 백과사전 같은 박씨 아저씨의 거침없는 목소리, 먼 길을 오갈 땐 느리고 묵직한 화물자전거를 끌고 다니시며 나무 지게에 볏짚을 한 짐 가득지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며 타령을 부르시던 김씨 아저씨의 구수한 목소리, 밭의 이랑을 자로 잰 듯 반듯하고 풍성하게 만드시던 아랫마을 아저씨의 관리기 소리는 이제 과거의 소리가 됐다. 시장 통에서 소박한 삶을 일구시고 진실과 정의를 이야기 하며 시대의 동지가 되어 주셨던 시인의 음성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각자의 터전에서, 책임지고 있는 자리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그 자신과 조직은 물론 공동체의 삶도 한껏 풍성해 지고 발전하리라 믿는다. 위정자들은 소리를 내기 보다는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위임받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위임해 준 군민의 목소리를 먼저 듣고 또 들어야 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지역을 살리고 살찌우는 길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답이 나온다.
보은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청년·학생들의 거침없는 하소연, 논과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의 그을린 얼굴이 쏟아 내는 푸념, 시장과 가게와 사업장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전하는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 모든 보은 군민은 나름의 생각과 고민으로 지역의 미래를 걱정하며 다양한 해법을 내 놓고 있다. 들으려 하지 않고 듣지 않으면 그 소리들은 공허한 메아리요 소음일 뿐이다.
장날이면 손님을 부르고 왁자지껄 흥정하는 사람들 소리로 넘쳐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고래고래 지르는 함성은 마을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들판엔 논과 밭으로 오가는 분주한 발걸음이 힘차고, 읍내 거리엔 마주하는 주민들의 반가운 인사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근한 목소리가 넘실거린다. 우리가 들을 수도 있고 듣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은 제 목소리를 낸다. 다양한 소리와 함께 우리의 시간은 흐른다.
요즘은 유난히 사람의 목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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