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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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부
  • 승인 2011.06.23 10:13
  • 호수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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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수필가, 보은 이평)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에드거 앨런 포는 행복의 조건을 이렇게 네 가지로 요약했다.
1)야외의 생활  2)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  3) 모든 야심으로부터의 초월  4) 창조적 행위 

표현 그대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위의 나열된 간이역을 지나쳐 가면 손짓하며 맞아주는 행복이 있을 것 같다. 산골에서 나고 자라서 어찌 보면 밋밋한 언덕의 능선처럼 젊음도 보내고, 이제는 그 속에서 절로 절로 나이 들어가니 첫 번째 전원에서의 혜택은 지금껏 충분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성하의 열기로 서서히 대지가 달아오르는 유월! 길가의 개망초는 제 키를 다 키우고 이제 꽃피우기에만 열중한다. 들판이 환하다.  한낮의 뜨거운 볕에도 바스러지는 보리는 수확을 기다리고 안개도 밤마다 밀도를 더해간다. 때맞춰 기승을 부리는 밤꽃 향기, 몽환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어둑발을 틈 타 피어오르는 안개를 저으며 보리타작을 끝낸 집들마다 까락 태우는 연기는 골목을 휘감았다. 웬만한 향기로는 대적할 수 없는지 밤꽃은 매캐한 냄새를 뿜어댔다. 가늘게 땋은 곱슬머리처럼 밤꽃이 풍성해지면 모닥불 더미에서 며칠이고 이어지던 냉글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코끝으로 쫓아온다. 밭둑의 오디는 벌써 익고, 제빛도 붉은 밀밭이 석양에 잠기면 주홍의 하늘을 시작으로 소리 없는 불꽃축제가 시작된다. 그 풍경에 점이라도 찍 듯 치르레기 여치는 치르치르 날개 비비는 소리만 길게 남겨두고 쉴 곳 찾아 노을 속으로 사라져갔다. 

질풍노도에 배 한 번 제대로 띄우지 않았으니 야망을 키우기 전에 생활이 우선시 되었다. 원대한 포부는 자리 잡지 못하고 늘 보고 접한 만큼의 안목으로 살아간다. 일상의 앞가림도 때로는 힘에 겨우니 그 이상의 욕심은 내게 과하다. 구차하지만 작은 일에도 감사해할 수 있는 구실이다. 가까운 이들에게 주어야할 사랑은 아직 채우지 못해 여유롭고,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여 혹 서운했던 감정도 오래가지 않아 크게 쌓이는 앙금도 없다. 그래도 반복되는 나날이 어찌 갓 뽑아 올린 마늘종처럼 야들야들하기만 할까? 아침부터 누적된 하루의 무게를 안고 자전거를 탄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맞이꽃, 장대나물 줄지어 환영하는 둑길을 달리면 평온함도 곧 뒤따라오고 크든 작든 행복이 허리를 잡는다.  

한차례 장대비가 쏟아진 뒤 곳곳에 새물길이 열린다. 내게 신의 무한한 능력이 갑자기 부여되어 모두를 위한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을 멈추게 하고 싶다. 작은 산 하나에도 골짜기마다 서너 개씩 폭포를 이루니 힘찬 물소리에 초목이 함께 춤춘다. 바싹 마른 개울을 지나칠 때면 주위의 푸른 숲을 아무리 봐도 목이 마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윤기를 더해주니 얼마나 신명나는 일인가. 그런데 그런 놀라운 능력을 겁 없이 써도 되는 걸까? 실제 내게 초자연적 힘이 있는 것처럼 더 바람직한 소원을 떠올리느라 거듭 고심한다. 오직 한 번뿐인 기회이니 갈등도 그만큼 크다. 몽상도 한여름 소나기처럼 간간히 찾아오니 더위는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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