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인반점 51년 역사, 보은 현존 가장 오래된 중국집
회인반점 51년 역사, 보은 현존 가장 오래된 중국집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9.07.11 10:40
  • 호수 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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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문 여느라 자식들 졸업식 한 번 참석 못했다
회인반점을 운영중인 유복수 할머니와 안덕선 할아버지의 모습.

보은에서도 읍소재지 특히 시가지와 면 지역에서도 사람 없는 한적한 길로 더 들어가면 낡고 오래된 풍경들이 눈 안에 들어온다.
회인은 과거 현을 이룰 정도로 보은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사람 구경하기 힘든 정적이 흐르는 공간이 됐다. 현의 중심지, 현감의 집무공간인 관아. 인산객사 등 화려했던 회인 중심지 중앙리도 지금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로 변했다.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중앙리 길을 걷다보면 마치 드라마의 배경이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대로변이지만 한적하고 시가지를 이루는 건물들의 빛바램, 세월이 읽혀지는 거리에서 오래된 가게를 찾아냈다. 회인반점. 정겹다. 붉은 빛깔의 간판에 중화요리라고 덧붙여놓았지만 가게 이름에서 중국집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질 정도로 가게 명패도 낡았다. 가게 전면에 내건 간판은 구석기 시대의 유물처럼 아주 오래돼 보인다. 번호 앞에 세 자리의 국번이 생긴 게 언제인데 지금도 전화번호 62번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62번' 전화번호를 돌리니 삑삑 거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정겨울까?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인이고 종업원인 회인반점 안으로 쑥 들어갔다. 남성 1명이 짜장면을 먹고 있었고 두 명의 아주머니들은 농사일을 하는 현장으로 직접 가져가겠다고 중국요리를 주문하고 있었다. 테이크아웃이다. 기자도 짜장면을 주문했다. 손님들이 나가고 기자 혼자 가게에 남게 됐다. 기회다. 방문 이유와 소속을 밝혔다.흔쾌히 승낙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회인반점의 역사를 구술했다.
83세인 안덕선 할아버지와 80세 유복수 할머니의 회인반점 스토리는 중국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증평과 청주가 고향인 고령의 이들이 제2의 고향 회인에서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주방에는 51년째 꺼지지 않는 연탄불이 있고 그 위에는 곧 면을 삶을 수 있는 물이 항상 끓고 있다.

51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회인반점.

#중국음식으로 잔뼈가 굵은 주인장 안덕선 어르신
먹고 살 것이 부족했을 때 한 명이라도 입을 덜어주는 게 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안덕선 사장도 한국전쟁이 채 끝나지 않았던 1952년(16살 때)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상경했다. 일할 곳을 찾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밥을 먹여준다는 말에 서울 번화가 중의 노른자인 소공동 지금의 조선호텔 옆 '공일로'라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고관대작들이 드나들던 유명한 맛집이라 안덕선 사장은 주방장 보조,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고급 중국음식 조리기술을 배울 수 있다. 14년간 자리 한 번 옮기지 않고 공일로에서 일했다. 그게 밑천이 됐고 덕분에 돈도 두둑하게 벌 수 있었다. 이젠 하산해도 된다는 계획 하에 안덕선 사장은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장사는 엉뚱하게도 고추장사를 시작했다. 배운 게 이게 아니었으니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았다. 수중에 있던 돈을 다 까먹고 말았다. 그 후 살 곳을 찾아 들어온 곳이 피반령 너머의 회인이었다. 그때가 1966년경. 안덕선 사장은 정육점 겸 중국집에서 1년반 동안 일하다 1968년 지금의 회인약방자리에 회인반점 간판을 내걸고 내 가게를 시작했다. 서울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요리를 배운 안덕선 사장 가게는 불티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정육점이 본업이고 곁들여 중국음식을 팔았던 가게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1년 후 자신이 종업원으로 일했던 곳을 인수했다.

나무로 된 간판.

#밀가루 한포대 짜장면 100그릇 장날 3포대
안덕선 사장 부부는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회인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돈도 제법 벌었다. 가게 자리가 났지만 수중에는 가게 인수할 만큼은 안됐었다. 마을을 졸이는데 종업생활 1년 반, 그리고 내장사 1년, 도합 2년 반 동안 열심히 사는 부부의 모습을 살펴본 회인사람들이 선 뜻 가게 인수자금을 빌려줬다. 40평 가게를 280만원에 샀는데 부족했던 60여만원을 지인들이 빌려줘 지금의 회인반점 가게를 살 수 있었던 것.
"이곳이 원래 농협창고여. 4개로 쪼개 가게를 내서 세를 살았는데 농협에서 창고를 파는 바람에 다들 자기가게를 마련할 수 있었지. 그때 짜장면 한 그릇 값이 5원이여, 우동 한 그릇 사먹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던 시절에 60만원은 매우 큰돈이었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다행히 가게는 계속 호황을 누려 빌렸던 60만원은 이듬해에 다 갚을 수 있었다. 맨손으로 시작해 불과 4년도 안돼 가게 한자리를 마련한 안덕선 사장 부부는 안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회인분들이 참 고맙지. 따지고 보면 내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거 아녀."라고 말한 안덕선 사장은 그러니 제2의 고향인 회인이 좋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시 이 동네의 음식점은 중국집 3집, 국밥집 3곳. 여관 2곳, 여인숙 1곳이 있었고 거리 좌판에서 떡을 파는 상인이 있었고 고기집이 3, 4곳이 있었다.
회인반점은 짜장면, 짬봉, 우동, 울면, 탕수육, 팔보채, 양장피, 해삼탕 등 지금 중국집에서 취급하는 요리를 거의 모두 팔았다. 서울 남대문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요리를 배운 사람이 직접 주방장이 되어 요리를 하니 맛은 보장된 셈. 특히 양장피 요리는 보은에도 소문이 났었다.
회인에서의 외식 손님 상당수를 회인반점에서 쓸어갔다. 밀가루 20킬로그램 한포대면 짜장면 100그릇이 나오는데 회인장날(매 4일, 9일)엔 밀가루 3포대를 썼을 정도였다. 방 4개, 홀에 식탁 5개를 놓았는데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회인반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회인인구가 1만2천여명이야. 면은 당시 회북과 회남 두 개이지만 사람이 참 많이 살았어. 고개만 넘으면 청주이고 대전이지만 교통사정이 안좋으니까 거의 회인장을 다녔지. 우리집 장사가 잘된 것 그 덕 안봤다고는 못해."
안덕선 사장 부부는 호황을 누렸던 회인반점을 추억했다.

회인반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배달통.

#식당 때문에 자식들 졸업식 한 번 못가
당시 종업원 4, 5명이 주방보조, 홀서빙, 배달을 했는데 늘 바빴다. 안덕선 사장은 자신의 청소년기 중국집 종업원 시절이 생각나 동생처럼, 때론 조카처럼 대했다 짬짬이 주방 보조일을 하는 직원들에게 짜장면발 뽑는 법, 짜장볶는 방법, 탕수육 소스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중국요리 기술을 배워나간 사람만해도 10여명은 된다.
면내 기관에 다니는 공무원이나 농협직원들 단골이 많았다. 군청이나 경찰서에서 회인으로 출장을 오면 회식은 거의 회인반점에서 했다. 사람이 많이 찾으니 주말이라고 일요일이라고 식당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고향에 왔다고 식당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있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그것이 염려돼 거의 문을 닫지 못했다.
오죽하면 슬하의 아들 셋을 대학교까지 다 가르쳤는데 초중고대학교 졸업식을 단 한 번도 가지 못했을까.
부인 유복수씨가 회인반점 51년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아쉬워하는 것 중의 한 가지가 자식들 졸업식에 가지 못한 것을 꼽는다. 코흘리개 시절을 보낸 자식이 대견해 한복을 입고 국민학교 졸업식장을 찾은 엄마가 꽃다발 한 뭉치를 아들에게 주고 기념으로 찍는 초등학교 졸업사진은 물론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부모에게 학사모도 씌워주며 찍는 그 흔한 졸업식 사진 하나가 없다.
장사하느라 늘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큰 아들이 가게에 들인 다락방에서 남동생 둘을 돌봤는데 싸움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의좋게 지낸 자식들을 보면 고맙기 그지없다. 동생들을 잘 돌보면서 공부를 잘해 연세대 졸업 후 두산중공업에 취업한 큰 아들과 청주의 한 병원 원무과에 있다는 둘째 아들, 막내아들도 기업에 다닌다는 안덕선·유복수 사장 부부의 잘진 자식농사가 지금 남아있는 가장 큰 재산이다.

#다리가 조금 아플 뿐 아직은 장사 할 수 있다
장사가 잘 될 때 청주나 대전 근교에 땅을 조금 사뒀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 유복수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젊어서 돈 만질 때 투자를 해놓으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감히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도 지금 갖고 있는 회인반점 가게 문만 열면 사람들이 찾아와 짜장면 사먹고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우리가 일해서 용돈 벌이도 하니 이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거라도 있으니 행운이고 행복이라며 작은 것에 만족하는 안분지족의 삶에 절로 박수가 쳐졌다.
안덕선 사장이 지금도 지키는 철칙이 있다. 그것은 연탄 불 피워서 요리하고 방을 데우던 그 때 그 시절처럼 회인반점 주방의 연탄불 위에는 언제든지 면을 삶을 수 있는 물이 끓고 있는 것이다. 한번도 꺼지지 않는 연탄불은 주방장 안덕선 사장의 변함없는 고집이다. 그 고집으로 회인반점의 51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다리가 조금 아프긴 하지만 아직은 요리를 할 수 있어요.", "나도 아직까지는 안한다는 생각은 안하고 있어요" 부창부수 안덕선 사장 부부의 회인반점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이 느껴졌다.
4차산업혁명 디지털 시대이지만, 오래되고 낡은 풍경이 오히려 정겹게 다가온다. 6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는 중국집도 들러볼겸 회인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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