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원 가로수의 운명
소공원 가로수의 운명
  • 편집부
  • 승인 2011.04.21 09:36
  • 호수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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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진(시인/보은읍 강산리)

주로 자영고등학교 앞 도로를 이용하여 읍내를 출입하다가, 사정에 의하여 소공원 길을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그 길에는 양쪽으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보기 좋게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깊어가는 어느 가을날 그 가로수에서 참으로 기이한 현상 하나를 목격하게 되었다.

읍내를 벗어나면서 왼편으로 심어진 은행나무들은 잎이 샛노랗게 물들어서 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내고 있는데, 오른편에 늘어 선 나무들은 어인일인지 무슨 한이라도 품은 듯 검푸른  녹색 그대로 깊어가는 가을을 버티고 있었다.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이 기이하여 살펴보았더니 그 나무들 머리위로는 예닐곱 가닥의 전선들이 지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들이 그 전선들에 닿지 않도록 약 4∼5m 높이에서 나무의 우듬지와 가지들이 모두 잘려 있었다. 그것은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자라는 대로 잘려서, 나무들은 마치 모지라진 몽당비처럼 초라한 꼴로 서서 마지못한 삶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제철에 단풍도 제대로 못 들고 열매도 한번 맺어보지 못 한 채 초겨울 된서리 앞에 그 푸른 잎들을 그대로 쏟아놓고 마는 것이었다. 잎이 진 나무들은 미관상으로도 보기가 흉하고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현상들의 원인을 확실히는 모르지만 나무위로 지나는 전선의 전류 탓이거나, 자라는 대로 가지가 잘려나가는 나무들의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식물도 인간처럼 어느 줄에 드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구나 싶었다. 그러나 나무는 인간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이 생사여탈이 오로지 인간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한 말 못 하는 나무들에게 인간들의 이익과 편리만을 위하여 저토록 가혹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물론 전력과 정보를 공급하는 사회 기반시설들의 중요성과 이를 보호 관리해야 하는 분들의 노력과 고충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은 우리 모두 관심을 가지고 지혜를 모으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문제는 그러한 시설물 아래 심은 수종의 선택에 있는 것 같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식물가운데 가장 오래된 나무중의 하나다. 2억5천만 년 전에 만들어진 고생대의 지층에서 화석으로 발견 되면서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흔히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그 과에는 오로지 은행나무 1종만 살아남아 가까운 친척도 하나 없는 외로운 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나무는 무려 60m정도 까지 자라는데 영동군 천태산에 소재한 영국사 경내의 은행나무를 보면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거목으로 자라는 수종을 전깃줄 아래로 심었으니 그러한 부작용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위와 같은 장소에는 애초에 키가 작으면서도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할 수 있는 관목(灌木)  류의 수종을 선택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키가 크지 않으면서도 봄에는 노란 꽃이 아름답고 가을에는 빨간 열매가 보기 좋은 산수유나무나, 선녀들 머리에 꽂으면 어울릴 것 같이 꽃 모양이 신비한 자귀나무들이 심어진 소공원 길을 상상하면 마음이 훨씬 포근하고 풍요로워진다. 무엇이든 똑같은 것만을 추구하는 획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다면 우리 주변에도 그러한 환경에 적합한 수종은 얼마든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선택은 기존 도로의 개선이나 새로운 도로의 개설에도 꼭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구입한 병아리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가지고 놀다가 예사롭게 아래로 던지며 좋아하는 광경을 보고, 걱정과 한탄을 함께 담은 신문기사에 공감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염려들은 그 몇 구루의 나무나 병아리 몇 마리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그러한 행위들 속에 잠재한 생명 경시의 무감각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생활의 편리를 위하여 나무를 베어 자원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육체의 영양 공급을 위한 육식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것은 살아있는 생명 대한 무자비한 학대 행위와는 경우가 다르다.  

생명에는 크고 작거나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없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만연하는 인명 경시 풍조도 이러한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과소평가나 무시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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