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날의 추억
정월대보름날의 추억
  • 편집부
  • 승인 2011.03.03 10:25
  • 호수 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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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순(시인, 마로관기)

어릴 적 조카네가 옆집에 살았다. 나는 정월대보름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카네 집으로 가서는 나와 동갑네인 조카의 이름을 불렀다.

"진용아! 진용아!" 부르면 무심결에 대답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러면 "내 더위 사 가!" 하고는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살던 외할머니는 귀밝이술이랑 부럼으로 호두를 준비했다가, 보름날 아침에 호두를 주면서 깨먹으라고 하셨다. 그래야 일 년 동안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마을 중간쯤에 공동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을 제일 먼저 길어다 밥을 지어먹으면 부자가 된다고, 엄마는 새벽 일찍 일어나 물을 길러 갔지만 늘 누군가가 먼저 길어 갔다는 것이다. 먼저 왔다 갔다는 증표로 물동이를 일 때 머리에 얹는 따발이를 그곳에 두고 간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무리 일찍 가도 누군가가 먼저 왔다 갔다는 따발이가 있어서 늘 서운해 하셨다.

보름 전 날엔 오곡밥과 갖가지 묵나물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는 마을 앞 논으로 아이들이 모이면, 쥐불놀이를 하는 것이다. 낮에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뚫어 놓았다가 거기에 작은 나무들을 넣고, 불을 붙여서 빙글빙글 돌리면 나무가 활활 타면서 보름달처럼 둥근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우리는 추운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쥐불놀이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남은 오곡밥을 이집 저집 돌며 훔치다가 먹고는 했다. 어른들은 솥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도 아이들의 장난을 눈감아 주곤 했다.

어느 핸가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점 아이들이 많아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에 손을 맞잡고 운동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강강술래을 부르면서.

보름달은 그렇게 쥐불로, 강강술래로, 우리들 가까이 둥글게둥글게 다가오곤 했다.

어른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는 윷놀이를 했다. 모나 윷이 나오면 신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멍석 가장자리를 돌기도 하고, 멍석 한 가운데에서 재주를 넘기도 했다.

정월대보름날은 그렇게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신나는 명절이었다. 그 때 나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보름달을 보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정월 보름날

깡통에 나무토막을 넣고
힘차게 돌리면
동그랗고 환하게
태어나는 보름달

심심하던 보름달이
일 년에 꼭 한번
땅에 내려와서는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아요

 

옛날이 그리워서 지어본 동시다.  지금도 그 때처럼 둥근 보름달은 변함없이 떠오르지만, 설날도 그렇고 정월대보름도 그렇고 점점 재미가 없어진다. 시절 탓인가? 세월 탓인가?

지금의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추억을 이야기 할까? 휘황한 불빛에 늘 살고 있는 아이들이 보름달을 올려다나 볼까? 창호지 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무척이나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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