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청천의 빛과 그늘
보청천의 빛과 그늘
  • 편집부
  • 승인 2011.02.24 10:30
  • 호수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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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진(시인/보은읍 강산리)

국토의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우리 고장은 시원하게 흐르는 강줄기도 하나 없어서, 자욱한 물안개 속에 수묵화처럼 고즈넉이 잠긴 강마을이 그리울 때가 있다. 또한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시원한 바다풍경이라도 보고 싶으면 큰 맘 먹어야 한 번 떠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쉬운 대로 보청천이 있어서, 급속도로 치닫는 문명사회에 자칫 삭막해 지기 쉬운 사람들의 정서를 어루만져 주고 있다.

나의 거처인 강산리 새동네에서 출발해 농업기술센터 앞에서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보청천은, 읍내까지 불과 4∼5분사이의 짧은 시간이지만 적잖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지금은 전례 없이 계속되는 혹한 속에서 보청천이 동장군의 인질처럼 두꺼운 얼음에 쓸쓸하게 억류 되어 있지만, 미구에 닥칠 봄날에 해빙이 시작되면 물오리 떼가 물살을 가르며 상류에서부터 슬슬 얼음을 밀어내리기에 분주할 것이다.

그 짧은 구간에서도 보청천은 물살이 빠른 여울을 이루기도 하고, 작은 섬 모양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또 봇도랑이 합류하는 곳에는 고운 흙을 길게 쌓아 개펄을 펼쳐 놓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하류로 갈수록 큰물이 된다. 물가에는 넉넉한 갈대와 부들, 마름 등 각종 수초들이 숲을 이뤄 물고기를 비롯한 뭇 생명들이 깃들이는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강줄기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작으면 작은 대로 면면히 흐르며 우리 고장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때로는 경이로운 시적 영감을 선물하는 보청천을 나는 강으로 높여서 대접해 부르고 싶다.

강둑에는 수많은 식물들이 모여서 크고 작은 저들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제 해토머리가 지나고 언 땅이 풀리면 갖가지 연두 색깔의 새싹들이 움돋아서 융단처럼 강변을 덮을 것이다. 겨우내 쓸쓸해 보이던 갈대숲에서도 새싹들이 키를 다투며 돋아난다. 묵은 갈대들은 새싹들이 제 키만큼 자라서 뼈가 여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느 순간 홀연히 그 자취를 감추는 걸 보면서 자연의 신비한 섭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오월이 되면 강변에는 노란 애기똥풀과 하얀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이 꽃들은 낱개로 보면 크게 볼품이 없지만, 떼 지어 군락을 이루면 제법 운치가 있어서 한 계절을 풍요롭게 장식하기도 한다.

봄물 그득한 강에는 물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한가로이 물살을 가르고, 백로들 틈에 보기 드문 재두루미도 섞여 먹이를 찾아 서성인다.  이렇게 새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을 보면 이 강이 얼마나 건강하게 보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새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들의 먹이인 물고기가 풍부하다는 뜻이고, 물고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수질과 서식환경이 양호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풍경도 종곡천과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이평교를 경계로 그 끝을 맺는다.

이평교 아래로는 허구한 날 끝없이 파고, 뒤집고, 다시 쌓기를 진행 하는 동안 그 많던 물고기들은 자취를 감추고, 물가에는 수초 한포기 보기 힘든 삭막한 풍경이 펼쳐진다. 나는 그러한 풍경에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만다. 물가에 자라는 식물들은 무작정 제거해야할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갈대를 비롯한 각종 수서식물들은 물속에 녹아 있는 질소성분 등 여러 가지 오염물질들을 흡수하여 물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하고, 물고기를 비롯한 뭇 생명들의 보금자리를 이루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미관상 말끔한 자연만이 좋은 환경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연은 오로지 깨끗한 자연만이 아니라 깨끗하고 건강한 자연환경이다.

건강한 자연의 첫째 조건은 종(種)의 다양성에 있다.
여러 가지 무기물질들과 미생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그 위에 다양한 식물과 동물들이 어우러져서 유지되는 자연이 건강한 자연환경이다.

이평교를 경계로 위쪽과 아래쪽을 비교해 보면서 진정한 의미의 자연보호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담하게 조성된 소공원 입구에는 큼직한 자연석을 주어다가 훤하게 잘 생긴 돌의 이마에 자자(刺字)하듯이 '자연보호'라는 문구를 음각으로 깊이 새겨 세워 놓았다. 돌에 새겨 강조할 만큼 자연보호를 외치지만, 이러한 행위 자체도 진정한 자연보호를 위한 바람직한 일은 아닌듯하다.

자연보호는 결코 구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연보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간섭과 통제를 최소화 하는 일이다. 필수불가결한 부분만 아주 조심스럽게 손질하고, 불요불급한 곳들은 그냥 자연에게 맡겨 놓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연이 저 스스로 알아서 오염된 곳은 정화 시키고, 상처 난 곳은 치유하면서 그들의 질서에 따라 건강하게 가꾸어 나간다.

우리 인간들의 모체(母體)인 자연이 건강해질 때, 우리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갖가지 혜택들을 무한정 제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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