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많은 민족, 그 정을 새로운 열정으로 변환시키자
정이 많은 민족, 그 정을 새로운 열정으로 변환시키자
  • 편집부
  • 승인 2011.01.27 10:19
  • 호수 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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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호(속리산수정초등학교 교장)

1980년 2월부터 4년 동안 일본에 파견근무를 나갔었다. 당시의 교육경력이 11년째이고 집 나이로는 서른 두 살이던 해이다.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 너무도 놀랐다. 내가 일본에 대하여 알고있는 게 무엇인가? 너무도 부자나라여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국에서 합격한 파견교원인데도 21명이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었다. 중앙정보부, 통일원, 교육부의 교육도 받았는데 막상 현장에 오고 나니 모두가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지하철을 탈 때 우리나라는 역무원이 승차권을 받아 펀치로 눌러 구멍을 내어 재활용을 못하게 했던 때다. 그런데 일본은 개찰구 기계가 검표를 하고 있었다.

30여년 전인 그 당시도 정기권이 카드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은 촌놈이라서 청주나 서울에 대해서도 잘 몰랐는데, 일본을 우리나라 전체와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은행이야기도 해보고자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은행은 통장을 가지고 은행에 가서 손바닥만한 전표에 예금을 하거나 찾을 금액을 자필로 써서 통장과 함께 창구에 냈다. 직원은 그 전표를 들고 금고로 들어가 원래의 장부를 찾아가지고 나와 금액을 원장과 통장에 적어 넣고 아주 작은 도장을 찍은 다음 돈을 저금을 하거나 찾았던 때다.

그런데 일본은 달랐다. 우리나라의 지금처럼 현금카드와 통장을 함께 활용할 수 있었다. 카드로 입금과 출금이 가능하다니 나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나의 거래처는 제일권업은행(第一勸業銀行)이었다. 이 은행에서 거래를 한 후 옆에 있는 미애(三重)은행으로가 나의 잔금을 확인하고 통장에 기재를 하였더니 옆의 은행에서 찾은 금액도 이미 온라인 시스템으로 다 정리가 된 것이었다.

1980년 이전에 금융 전산시스템이 모두 완성된 것 같았다. 백화점, 지하철, 관공서, 비행장, 기차역 등의 모든 곳에서 은행의 입출금이 카드로 가능하다니 보은 촌놈의 눈에는 그저 타임머신을 타고 이상한 나라에 온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었다.

우리나라의 KTX와 같은 신깐센이 전국을 누비고 있고, 그 속도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저 놀랍고 부러울 뿐이었다. 길거리에는 냉장고 세탁기 컬러TV 등 버리는 물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때 보은에는 냉장고 있는 집이 드물었다. 우리나라의 컬러TV는 1982년부터 방영 되었으니까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길에다 버린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하수를 수동펌프로 퍼올려 빨래하는 것만 보던 내게, 세탁기란 미술시간에 상상화로 그리던 물건이었다. 당시 보은에는 자가용이 50대도 안 되었다.

보은의 도로에는 중앙선도 없었고, 신호등도 없었다. 자전거에 도시락을 매달고 비포장도로인 중초초등학교 길을 달리던 그 시절이 TV의 오지탐험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일본으로 선진국 연수를 하러 와서는 코끼리 전자밥솥이나 워크맨, 카메라 등 전자제품을 사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사람들이 한심스러웠는데 사실은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갔다 오면, 한국에서는 사올 것이 '소주하고 김 밖에 없다'며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때로는 한국 사람인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고, 감출 수 있다면 감추고도 싶었었다. 국가수준에서 정신교육을 시키며 국가관을 심어준 해외파견 공무원이었는데도 말이다.

1983년 우리 큰 아들을 일본의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아래로 두 딸아이를 일본의 보육원에 보내면서 또 다시 놀랐다.

일본은 전국이 학교에서 급식(유상급식)도 했다. 교육시설도 훌륭했고 선생님들의 교육자적인 자세도 부러웠다.

우리나라는 아이들이 소풍을 갈 때 음식을 싸가고 싶은 대로 다 싸 보낸다. 절재교육이나 남을 위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안내장에 식사는 어느 정도, 과자류와 음료수, 과일의 숫자까지 명시하여 그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알려주었다.

하지만 집사람은 큰애가 갖고 가겠다는 대로 다 넣어 보냈다. 그런데 오후에 돌아와 배낭을 열어보니 아침에 싸 보낸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선생님과 약속 한 것만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교실에 두었다가 소풍이 끝나고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파견 나온 교육원장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당시 교육자적인 양심과 애국심이 부족해서였을까?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좋고, 멋지고 자랑스러운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자랑스럽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 한국인에게 가슴 따듯한 정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모두가 '이웃사촌'으로 살아가는 것도 자랑스럽다.

효경사상이 생활 속에 살아 있어 자랑스럽다. '빨리빨리'란 문화가 오늘날 한국이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것도 자랑스럽다.
똑똑하고 키도 크고 잘 생긴 우리 후손들이 있다는 것도 자랑스럽다.

어느 새 우리는 여기까지 와 있다. 옛날의 부끄러움이 자랑스러움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경제 성장도 이루었다.

벚꽃처럼 화끈하게 하루 아침에 피고 하루 저녁에 지고 마는 20세기형의 아날로그 국가가 아닌, 스스로 자기가 피고 싶을 때 피고 지고 싶을 때 지는 다양성, 21세기형 디지털시대로 대변되는 우리의 문화와 한국인의 삶이 이제는 아주 자랑스럽다.

일본에 살면서 한 동안 한국이, 한국인임이 부끄러웠었는데 이제는 모든 게 자랑스럽다.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과 우리의 멋진 미래에 대한 설렘이 용솟음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글인 한글(훈민정음)이 있다는 것이 더더욱 자랑스럽다. 내가 속리산을 '훈민정음 마을'로 만들어 세계적인 문자 중심의 관광지로 만들고 싶다고 하는 것도, 부끄러웠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여기까지 멋지게 잘 달려 왔다.
요즈음 구제역과 보기 드문 한파, 정치권의 혼돈, 남북한 문제, 학교급식을 비롯한 교육 현안문제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 나왔고 또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다.

정이 많은 민족, 그 정을 열정으로 변환시켜 새로운 국운을 창출하자. 2011년 우리 모두 21세기의 두 번째 막을 멋지게 열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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