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옛 이름
그리운 옛 이름
  • 편집부
  • 승인 2011.01.20 10:23
  • 호수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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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순 (시인/마로관기)

내가 어릴 적 안동무수라는 이가 있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아주 단단하고 야무지게 생긴.

그는 커다란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옷이며 옷감 등을 팔러 이 마을 저 마을을 걸어서 돌아다니곤 했는데, 우리 동네에 오는 날은 우리 집에 들러 밥도 얻어먹고 몇 시간씩 쉬다가 무언가는 꼭 한 가지씩 팔고 갔다. 맘 좋은 우리 아버지가 고단한 그의 보퉁이를 덜어주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홀로 자식 둘을 키우는 어미였는데, 얼핏 들은 얘기로는 어딘가에 있는 신랑을 찾아가다가 차에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차돌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신랑 복이 어지간히 없었는지, 어릴 적 보아온 그의 행상이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어릴 적 입은 옷의 절반 이상은 아마도 그의 보퉁이에서 나왔으리라.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 가리지 않고 머리에 큰 보퉁이를 이고 팔을 휘저으며 오던 안동무수라는 이, 그가 가끔은 그리워진다.

자야할머니라는 노인네가 있었다. 혼자 손녀딸을 키우는. 어릴 적 나의 눈에도 지지리도 궁상맞게 생긴 오갈 데도 없는 노인네에게 아버지는 우리 집 사랑채를 내주었다. 손바닥만한 농사거리도 없던 자야할머니는 시루떡을 해서 팔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 노인네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도와주곤 했다. 무거운 것을 든다든가 떡시루를 들어주는 일 따위를.

어느 핸가 자야 할머니는 시루떡을 쪄놓고 아버지에게 시루를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시루본을 제대로 떼지 않았는지 시루와 함께 딸려온 솥의 펄펄 끓던 물이 아버지 발에 쏟아지고 말았다. 양말과 함께 살가죽이 벗겨지고 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앓는 소리를 했다. 아버지는 평생 그 흉터를 발에 달고 사셨다.

그 자야 할머니는 죽을 때가지 우리 집에 함께 살았는데, 죽은 다음에는 장사 지내서 우리 밭가에 묻어 주었다. 어릴 적 우리 식구들을 떠올릴 때면 늘 함께 생각나는 자야 할머니. 자야 할머니 또한 그리운 이름이다.

외할머니는 자식 복이 없어 아들을 일찍 보내야했다. 그래서 그런지 양아들처럼 키우면서 함께 사는 이들이 있었다. 작은식이, 덕용이, 엄바우, 이들은 외할머니 일을 도와주면서 아들처럼 그렇게 함께 살았다. 덕용이란 분은 '어무이'라고 외할머니를 부르곤 했다. 나를 늘 업어주던 작은식이, 정식 이름은 뭔지 생각나지 않지만 외할머니는 그를 작은식이라고 불렀다.

이 겨울밤, 문득 그리운 옛 이름들이 생각난다. 새벽 일찍 일어나 군불을 때며 쿨럭쿨럭 기침을 하던 아버지가 그립고, 김치 송송 썰어넣어 양념장에 메밀묵을 해주던 외할머니가 그립고, 마냥 철없이 뒹굴던 동생들이 그립다. 늘 식구들의 배경이 되었던 엄마, 이 겨울엔 모두모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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