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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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부
  • 승인 2011.01.13 09:41
  • 호수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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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진(시인/보은읍 강산리)

불가(佛家)에서 이르기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듯이, 우리는 일생동안 수많은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 중에는 고래 심줄처럼 질겨서 차라리 피하고 싶은 악연도 있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삶에 활력과 보탬이 되는 소중한 인연도 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성장기에 만나는 인연은 한 인간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나에게도 풍요롭고 소중한 유년의 추억을 넉넉하게 마련해주신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한분 계신다. 선생님과는 초등학교 6학년 한해를 함께 했을 뿐이지만 그 인연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시행되던 시대여서 학급을 진학반과 비진학반으로 나누어 운영했다. 진학반은 방과  후에도 학교에 남아 밤늦도록 진학공부에 매달렸다. 그 시절에 암기한 수학 도형의 넓이 구하는 공식이나,  음악 시간에 외운 '고향의 봄' 계명이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꽤나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아예 교실에서 숙식을 해결하시면서 우리를 가르치셨다. 석유곤로에 손수 밥을 지어서 식사를 하시는데, 그 하얀 쌀밥에서 모락모락 풍기던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의 그런 생활은 꼭 진학반 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비진학반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가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비록 중학교에는 가지 못 하지만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을 무엇하나라도 배워야 한다."면서 십리 상거(相距)나 되는 선생님 댁에서 손수레에 재봉틀을 싣고  손수 옮겨 오셨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셨다.

일상적인 학교생활에서도 늘 올바른 습관을 가지도록 가르치셨다. 한 예로 밖에서 뛰어놀다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는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고 교실에 들어오도록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은 이제 아내의 핀잔을 무릅쓰고 한겨울에도 자주 창문을 열어놓고 옷을 털어 입게 하는 오래 된 습관이 되었다. 평소에 엄한 훈계나 꾸지람도 없이 몸소 행동으로 선생님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오로지 선생님이 되기 위해 태어나신 것 같은 그런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크면 선생님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교직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교직의 꽃이라는 관리자가 되어, 자신의 포부도 마음껏 펼쳐보고 또 그 권위를 누려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오불관언(吾不關焉) 아예 그런데는 뜻을 두지 않으시고 오직 교육에만 전념하시다가 명예롭게 교직을 마감하셨다. 오랜 기간 관리직에 있던 어느 교육자가 정년퇴임을 하면서, 교사로서의 기간이 너무 짧아 참된 교육에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술회를 들은 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선생님의 뜻이 더욱 빛나고 자랑스럽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제자들의 가르침에 진력하시던 선생님도 이제 많이 연로하시고, 맑은 눈망울로 그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도 어느덧 반백의 중년이 되어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깜냥대로들 살아간다.

그러나 지금도 선생님 앞에서는 여전히 철없는 어린 제자들이다. 설 명절에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면 고희를 훌쩍 넘기신 선생님께서 맞절로 맞으신다.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시는 선생님 앞에서 감히 허튼 자세로 삶을 대할 수가 없다.

부족한 제자의 시원찮은 글로 인해 선생님의 명예에 혹 누나 끼치지 않을까 하여 선생님의 함자를 밝히지 않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읍내 인근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의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노후를 보내시는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시다. 제자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참석 하셔서 적지 않은 금일봉과 함께 격려해 주시더니, 가끔 나오는 동인지라도 한권씩 전해드리면 즐거워하신다. 자주 찾아뵙고 끝없는 가르침을 받아야겠지만 늘 마음뿐이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셔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제자의 삶에 변함없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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