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들꽃 이야기
우리 들꽃 이야기
  • 편집부
  • 승인 2010.10.21 08:47
  • 호수 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원진(보은읍 강산리/상업)

그동안 본보 '결고운글' 집필진으로 활동했던 조성근님이 개인 사정으로 칼럼 집필을 중단하게 됐습니다. 10월부터는 산외면 장갑리 출신으로 보은 재래시장에서 상업을 하고 있는 조원진(보은문학회, 시인)님의 옥고를 게재합니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글)

 

지난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구질구질하게 비도 많이 내려서 이 여름 언제 끝날까 싶더니, 계절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지 시월도 중순을  넘기면서 이제는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파고든다.

이때쯤이면 산자락과 강변에는 가을의 전령인 노란 색깔의 마타리가 흐드러져 바람에 흔들리고, 억새풀과 갈대의 무리들도 은빛 머리를 풀고 깊어가는 이 가을을 노래한다.

나는 억새풀과 갈대에 대한 부끄러운 기억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소위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위인이 억새풀과 갈대를 구분하지 못하여, 강변에 우거진 갈대숲을 노래한답시고 그것을 억새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그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요즘 우리 들풀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면서 이제야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 작품을 읽은 독자들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니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던 우리 주변에 널린 풀들이나 나무들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답답한 마음에 우선 식물도감을 찾아보면서 하나씩 배워 나갔다. 관심을 갖게 되니 숲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도 생겨서, 숲 환경교육센터에서 실시하는 4개월간의 숲 해설가 교육과정도 이수하게 되었다.

늘 보면서도 이름을 모르고 지나쳤던 풀 중에 '그령'이라는 풀이 있다. 지금은 시골 농로도 거의 콘크리트 포장이 되었지만, 비포장이던 예전 시골길에는 우마차가 많이 다녔는데 그 마차 바퀴가 닿는 자리에는 풀이 나지 않고 길의 가운데와 양쪽 둑에만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그러면 어린 악동들은 그 질긴 풀을 양쪽으로 묶어서 숨겨 놓고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에 걸려 넘어지면 키득거리며 좋아했었다. 그 추억어린 풀이 바로 '그령'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우리 주변 들꽃들의 재미있는 이름을 관심 있게 살펴보면, 거기에 얽힌 우리 민초들의 삶의 애환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들꽃 중에는 특히 며느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많다.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등 인데, 예나 지금이나 풀기 어려운 고부간의 갈등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이름들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꽃 이름 중에 '개불알꽃'이라는 것이 있다. 분홍색의 달걀 크기만 한 이 꽃은 매우 아름다운 꽃인데, 무분별한 채취로 인해 지금은 야생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귀한 꽃이 되었다. 그 이름이 민망했던지 누가 '복주머니 난'이라는 이름도 붙여 놓았지만, 이처럼 실감나고 정감어린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흙에 묻혀 들풀들과 함께 뒹굴며 살아온 우리 민초들에 의하여 지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가을 산에 올라보면 벼랑 바위틈에 무리지어 피어 있는 구절초도 볼 수 있다. 구월이 되면 줄기의 마디가 아홉이 되는데, 이 때 베어서 쓰면 약효가 좋다하여 구절초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이 꽃은 마치 청상의 소복 빛깔을 하고 있어 처연한 마음을 갖게도 하는 꽃이다. 이렇게 하찮아 보이는 미물들도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면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면 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옛 문인의 말이 있다. 날마다 마주치는 이웃들 중에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보다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정이 더 가고 따듯한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듯이, 우리의 들꽃들도 저마다 가지고 있는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다소곳이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잠시 짬을 내어 들판에 나가, 들꽃들의 그윽한 향기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이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