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박나무
후박나무
  • 편집부
  • 승인 2018.05.31 13:57
  • 호수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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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철

연구실 창은 하나의 그림 액자다.  한 달 전에는 벚꽃 그림으로 화폭을 화사하게 채워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후박나무 꽃과 넓은 잎으로 액자를 장식했다. 책을 보다 잠시 쉴 겸 일어나 창 가까이 서 본다. 앳된 연두색이 점차 녹색으로 변하면서 훤히 보이던 숲 샛길도 이제는 더는 볼 수가 없다. 심한 미세먼지로 한동안 꼭 닫았던 창문을 열자 후박나무 꽃향기가 기다렸다는 듯 창틀을 넘어 나에게 달려든다.

아버지께서는 꽃을 좋아하셨다. 집에는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꽃이 늘 가득했다. 가끔은 친구들과 놀다가 화분을 깨거나 꽃을 꺾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불호령은 늦둥이인 나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찬바람이 불면 화분을 모두 방으로 옮겨서 키웠는데 한옥이라 겨울을 지나고 나면 많은 화분이 얼어 죽어 아버지를 한동안 속상하게 했다.

아버지께서 아끼시던 나무가 있었다. 바로 후박나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아버지께서 이 나무를 정원 옆에 심으시곤 얼마나 좋아하셨던지…. 몇 년이 지나자, 후박나무의 빠른 성장으로 정원의 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높은 키에 사람 얼굴을 가리고도 남을 큰 잎은 빛을 차단하여 다른 나무의 성장을 방해했지만, 아버지는 그대로 뒀다. 아마 다른 나무였다면 전지가위로 '싹둑싹둑' 잘렸을 것이다.

5월이 되면 후박나무 꽃향기는 온 동네 사람들을 취하게 하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가끔 우리 집에 들러 후박나무며 정원에 있는 꽃들을 보고는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께 간청하여 꽃나무를 분양해 가기도 했는데 이때도 꼭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꽃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아버지께서 중풍이 걸리시며 막을 내렸다.

연구실 근처 숲속에서 커다란 후박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는 듯 기뻤다. 그후 교수 한 분으로부터 그 나무의 정확한 이름은 후박나무가 아니라 '일본 목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 목련의 껍질을 약용으로 쓸 때 '후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진짜 후박나무와 중복되어 혼란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나야 지금이라도 올바른 이름을 알았지만,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후박나무로 잘못 알고 계셨으니 좀 안타깝다.

후박나무가 되었든 일본 목련이 되었든 지금 와서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나무였고 내 어린 시절 추억의 나무였기에 지금도 애틋한 정을 나눈다. 초등학교 가기 전 일이라 가물가물 하지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느 큰 사찰에 갔었다. 아버지께서 노스님께 큰절 하신 후 나에게도 절을 시키셨다. 나의 절을 받은 노스님은 가까이 오라고 하시더니 한참이나 어루만지며 귀여워 해주셨다. 아버지께서 내가 장성한 후 그 스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노스님은 아버지께서 젊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라는 말과 함께 나를 본 스님이 '집안의 기둥이니 잘 키우라'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막둥이 사랑은 각별했다.

그 사찰 경내에서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가 '일본 목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은인인 노스님을 생각해 그 나무를 각별히 사랑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젊어서 그 사찰에서 일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맡은 향기가 스님의 향기라고 생각하셔서 평생을 아끼셨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미세먼지가 있는지 갑자기 연거푸 기침이 났다. 나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갑자기 적막이 흐르고 꽃향기도 차단되었다. 꼭 이생과 내세가 이 창문의 안과 밖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향기 속에서 아버지를 잠시 보았다. 아버지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시고 '노스님의 예언이 맞으셨다고 생각할까?' 갑자기 내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그 옛날 아버지 어깨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커피포트에서 물이 다 끓었는지 '엥'하는 소리만 연구실 적막을 깬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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