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소원
아내의 소원
  • 편집부
  • 승인 2017.05.11 11:02
  • 호수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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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철

딸을 시집보낸 후 아내는 바빴다. 딸은 서울, 사위는 청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니 휴일이면 우리 집이 그들의 신혼집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평온하게 지내다 아내는 금요일만 되면 부산해진다. "몸도 약한 사람이 무얼 그리 많이 만드시오. 적당히 하시구려. 이제 한 서방은 우리 가족이요."라고 넌지시 말하면 아내는 들은 척도 않는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오."

사위가 서울로 새 직장을 얻어 떠나자, 나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휴일마다 번잡한 생활을 하지 않아서 좋았고, 아내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와서 좋았다. 그런데 아내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입으로야 당연히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만, 행동은 아니다. "애들이 아침밥은 먹고 다니는 건지, 가까이 있어야 반찬이라도 해 주는데… " "참, 걱정도 팔자요. 그런 걱정을 왜 하오. 이제는 자기들이 알아서 살아야지."

지난달 아들을 결혼시키고 나니, 신혼집이 지척이라 그런지 한동안 퇴근을 우리 집으로 했다. 퇴근한 아들은 전과 같이 아내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뒤적이기도 한다. "아들아! 결혼했으면 너의 집으로 가지 왜 이리로 오냐? 네 안사람이 아직 학교에서 퇴근을 안 했냐?" 하며 아내는 귀찮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루는 그런 아내에게 "아니, 한 서방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게 하더니 정작 아들에게는 왜 그리 서운하게 하오. 혹시 며느리를 질투하는 것 아니오?"라고 하자 아내는 새초롬한 눈으로 흘긴다.

그런 아들이 보름 정도가 지나자 발길을 뚝 끊었다. 아니 전화도 없다. 아내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이 안 되는지 안절부절 못한다. "아들이고 딸이고 다 키워 놓으면 자기들 스스로 큰 줄 안다니까. 멀리 있으면 멀어서 그렇다고 하지, 엎드리면 코가 닿을 곳에 있는데 와 보기는 커녕 전화도 없어. 괘씸한 놈." 하며 저녁이면 아들이 사는 아파트를 넘겨다보면서 한마디씩 한다. "언제는 장가간 놈이 자기 집으로 안 가고 우리 집으로 온다고 푸념을 하더니. 이젠 아들이 그립소? 결혼시켰으면 우리 곁을 떠난 거요. 죽을 먹던, 밥을 먹던 신경 끊으시오. 서운해도 할 수 없소. 그것이 인생이라오. 이제는 우리 부부만이 남는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 둘 중 하나도 먼저 하늘나라로 갈 것이오. 그럼 혼자 남아 있는 사람이 마무리 잘하고 뒤 따라오면 되는 것 아니겠소."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내는 갑자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다 조용히 말한다. "여보, 나는 당신보다 먼저 하나님께 가기를 원해요. 당신 없이 혼자서 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이야 혼자서도 잘 생활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럴 자신도 없고, 또 혼자서 오래오래 살기도 원치 않아요. 혹시 우리 어머니처럼 치매라도 걸리면 아이들에게 큰 짐이 될 텐데…"

"당신도 참, 왜 앞날을 걱정하오. 죽고 사는 것이야 우리의 영역을 떠나 있는 것이니 미리 걱정할 것 없소. 그리고 앞으로 의술이 발달하면 치매 정도는 얼마든지 고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열심히 운동하고 신앙생활 잘하시오."라며 아내를 쳐다보니 아내의 눈가는 벌써 촉촉해져 있다.

한 부모의 아들로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의 임무는 잘 마무리했다고 본다. 부모님 모두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아들과 딸이 좋은 짝 찾아 결혼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내의 마지막 소원까지 내가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아내의 소원이 바로 내 소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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