져주는 사람
져주는 사람
  • 편집부
  • 승인 2016.06.09 09:38
  • 호수 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수님, 이번 시험범위가 너무 넓어요. 중요한 부분만 다시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막나오려는데 한 학생이 제안을 한다. "글쎄, 범위가 넓긴 넓지만 강의시간마다 중요한 사항은 미리미리 여러분께 알려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어째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연구실에서 책을 보려는데 손전화가 '띵동'하고 울린다. 손전화를 열어보니 00학생이 보낸 글이다. "교수님, 금융론 시간에 00이가 제안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열중하지 않고 있다가 시험보기 전에 교수님께서 알려주는 내용만 공부하여 고득점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항의성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피식'웃다가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것 참 친구지간에 형평성문제까지 나오니."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기는 법만을 배워왔다. 마치 아프리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야생동물처럼 살기위해서는 남을 이겨야했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고등학교 때 생물선생님의 말씀이다.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수많은 경쟁에서 여러분이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바로 조금 전 시간에 배운 내용입니다. 수많은 정자가 치열한 경쟁을 하여 그 중 하나가 승리하여 난자와 결합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승리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가끔 아내와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승리(?)했는데 근래 들어서는 상황이 확 바뀌었다. 아내는 좀처럼 지려고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싸움을 걸어와 사정없이 공격하여 나를 초토화시킨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면 여성은 여성호르몬이 적어지고 남성호르몬이 강해져서 남성화가 되어서 그렇다는데 아내가 지금 그런 증세가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오히려 여성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되어 여성화가 되어 약해져서 그럴까?

어제만 해도 그렇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채널을 바꾼다. "여보, 지금 내가 보고 있는데 그렇게 바꾸면 어떻게 해요." "미안해요. 그런데 당신 왜 그렇게 화를 내요. 당신은 내가 TV볼 때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당신도 그런 적이 많다는 사실을…" "뭐요? 당신 지금 나하고 싸워보자는 것이요."하고 언성이 높아지자 아내는 좀 수그러졌지만 그 얼굴빛은 미안해하는 빛이 아니다. 나는 화가 나서 안방으로 들어와 분을 삭히려하지만 그리 쉽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책을 뒤적이다가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도리를 가지고 이기려는 것은 남자의 수양이고, 도리를 가지고 져주는 것은 남자의 도량(度量)이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묵상에 감긴다. 환갑을 넘어선 나이지만 아직도 부족한 면이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런저런 이유와 논리를 가지고 아직도 아내를 이기려고만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수업시간에 '형평성을 논한 학생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해 본다.

"얘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아내와 싸워서 이기면 그게 너에게 무슨 도움이 있겠느냐? 아내 마음 아프면 결국 그것이 다 너에게 돌아갈 테고, 가정의 안해(아내)가 싸늘하면 집안에 온기가 없어서 가족 모두가 감기에 걸릴 텐데 그게 이기는 것이냐? 지금이라도 아내와 화해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라. 더구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그러면 학생들은 너에게 무엇을 보고 배우겠느냐?" 어디선가 어머니의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류 영 철

충북대학교 겸임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