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에서 새 삶 꾸며가는 농아인 배민진·윤선희 부부
보은에서 새 삶 꾸며가는 농아인 배민진·윤선희 부부
  • 류영우 기자
  • 승인 2010.04.22 09:52
  • 호수 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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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도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기계음도,
자동차 엔진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배민진·윤선희씨 부부는 농아인이다.
농아인으로 살아오면서 부부는 늘 힘이 들었다.
그리 오래된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행복하다.
사진 속 두 사람이 만든 사랑이란 수화 표현처럼,
부부는 보은이란 낯선 땅에서
장애인도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짜릿한 진동만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기계음도, 자동차 엔진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청각장애 농아인 배민진(30·보은자동차공업사)에게 직장은 '고요한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자동차를 만지는 그의 손길 하나하나는 장애인들에게 일할 수 있는 즐거움과 보람을 전하는 커다란 울림으로 돌아오고 있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정다운 우리이웃으로 살아가는 이들 농아인 부부의 삶을 담아본다.

 

듣지 못해 겪는 어려움
"차를 뽑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속상해 죽겠다니까요. 새 차처럼은 안 돼도 깨끗하게 고쳐 주세요."
지난 20일, 보은자동차공업사 안. 크고 작은 접촉사고로 신경이 예민해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찌그러지고, 흠집 나고, 여기 저기 깨진 자동차 앞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큰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쪽에서 자동차를 손질하는 한 직원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말이 없다.
"일에 지친 걸까? 아니면 직원들과 다투기라도 한 걸까?"
작은 천 조각을 들고 때를 밀듯 오로지 자동차와의 힘겨루기에 집중할 뿐이다.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자동차를 툭툭 치며 손을 휘휘 젓는다.
그제야 자동차와 한 바탕 힘겨루기에 집중하던 직원이 밝은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 보은자동차공업사에서 일하고 있는 배민진씨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인이다.

손님들과의 소통이 중요한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농아인으로 일하는 마음은 어떨까?
힘들었다고 한다.
무시하는 말도 많이 들었고, 또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때리고 물건을 부수는 일도 수없이 당해봤다.
그리고 손님들이 말하는 복잡한 얘기들을 듣지 못해 늘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란다.
그리 오래된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지금의 직장은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

 

자동차와의 만남
배민진씨가 자동차를 처음 만난 건 2002년이다.
대전 원명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박람회에서 면접을 본 후 시작한 일이 바로 자동차 정비일이었다.
업무를 시작하며 처음 자동차 내부 모습을 보게 됐을 정도로 그는 자동차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알고 있던 지식이 없었던 만큼 일 또한 힘들었다.

자신과 함께 취업한 농아인 친구는 일주일도 안 돼 일을 포기했다.
하지만 배민진씨는 포기할 수 없었다.

'농아인들은 쉽게 포기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싫었고, 또한 친절하게 자동차에 대해 가르쳐 주던 반장님이 힘들게 혼자 일해야 하는 상황도 배씨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렇게 4년. 배씨는 젊어서 만나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 반장님으로부터 글과 그림을 동원해 자동차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고, 조금씩 자동차를 알아갔다.

 

낮선 땅 보은, 그리고 사랑

그런 그가 2008년 보은이라는 낯선 고장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그가 낯선 곳에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동료였다.

당시 보은공업사에는 농아인으로 오랫동안 일을 해 온 송재건(39)씨가 있었다.
"일반인들과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어려움을 함께 얘기할 농아인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보은에서 취업제의가 들어왔고, 이곳엔 농아인 동료가 있다는 얘기에 직장을 옮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지금은 다른 공업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송씨는 배민진씨가 낯선 보은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했다.

농아인 동료를 만나고, 또 낮선 곳에서 새로 정착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인생을 함께 하게 된 윤선희(29)씨와의 인연일 것이다.

부산 배화학교를 졸업해 배씨와는 지역적으로 연고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배민진씨와 윤선희씨는 2004년부터 지인의 소개로 알고 지내왔다.

친구처럼 서로의 어려움을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은 2008년 배민진씨가 보은 땅에 정착한 후 사랑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2009년 10월24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보은읍 삼산리 도성빌라에 예쁜 보금자리도 꾸몄다.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 아쉬워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몄지만 보은이라는 사회는 젊은 농아인 부부가 살아가기에는 그리 녹녹치 않았다.
무엇보다 관공서에서의 소통문제가 걸림돌이었다.

혼인신고를 비롯해 주소 이전 등 새 삶에 걸 맞는 많은 서류들이 필요했지만 보은지역의 관공서는 배씨 부부가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글로 써서 소통을 한다고는 하지만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도 없었고, 또 준비한 서류가 맞는지 확인도 안되더라고요. 군 민원실뿐 아니라 교통법규 위반으로 찾아간 경찰서에서도 소통이 안 돼 일 처리하는데 너무 애를 먹었어요. 농아인들을 위해 군 민원실이나 경찰서 민원실과 같은 곳에 수화통역사가 배치되면 이런 불편은 겪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단순히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만이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사회에 나서기 위한 장애인들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이 배씨의 생각이다.

"많은 장애인들이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무슨 일을 하던 장애인들에게 쉬운 일은 없는데도 말이죠. 순간순간은 힘들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면 일하면서 얻는 즐거움도 알게 되고, 또 보람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장애인들과 함께 일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장애인들과 함께 일 할 수 있는 세상과 함께 배씨는 또 다른 희망도 가슴에 품고 있다.
그 첫 번째는 하루빨리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소망이다. 또 다른 희망은 바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20년, 아니 10년 후에는 자동차 도장분야의 최고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꾸준하고, 진득한 맛이 있다"는 직원들의 평가처럼 배씨의 꿈도 그렇게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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