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의 진화, 요리를 보는 시대
'먹방'의 진화, 요리를 보는 시대
  • 편집부
  • 승인 2016.01.20 18:00
  • 호수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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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점심 드시지 말고 기다리세요" 토요일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모처럼 좋은 일이라도 있는갑다. 잠시 후 쇼핑빽에 무언가 들고 싱글벙글 들어와서 한상 차린다. '보통족발'과 '매운족발'을 꺼내 놓는 것이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TV프로에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요리사 B가 출연해 소개한 족발이란다. 아침에 구리에서 동대문까지 쏜살같이 달려가 11시쯤 도착했더니 이미 긴 줄 끄트머리에 차례가 되어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2개 남은 것을 사왔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어떤 이는 퀵으로 주문한 사람도 있어 방송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한다.

'매운맛족발'과 '보통맛족발' 두개를 놓고 그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프로를 본 이야기를 해가며 입이 월월 하도록 붉은 매운맛 족발을 입술이 퉁퉁 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매웠다. 쿨피스 음료수 한잔을 따라준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입가에 매운 맛을 싹 쓸고 내려가 언제 매운 음식을 먹었느냔 말도 없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매스컴의 힘이란 무서우리만큼 우리 식문화도 참 많이 바꿔놓은 것이 사실이다.

여성들 사이에 요리 솜씨 좋은 남자가 배우자감으로 인기란다. 요리를 할 줄 모른다면, 최소한 "밥 달라"는 소리 안 하는 남자가 좋다고 한다. 요즘 '먹방'의 홍수 속에서 새삼 각광받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집밥'이다. 식당에서 사 먹는 밥이 '밥'이고 집에서 먹는 밥이 '집밥'이다. 제대로 해 먹는 집밥은 귀한 것이자 로망이다.

TV 채널을 돌리다 어김없이 만나는 '먹방'의 포인트는 '남자가 요리하고 여성은 맛보는' 역할 분담이다. 소개되는 호텔이나 식당 맛집의 주방장도 대개 남성이고, 요리를 가르치는 스승이나 배우는 제자들 모두가 남성이다.

출산에 이어 요리까지 파업에 나선 젊은 여성들은 요리를 하는 대신 TV로 본다. 우리나라의 먹방 열풍을 한 외국 기자 눈에는 "방송이 요리 자체보다 재미에 치중하며 한국인에게 대리만족과 눈요기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요리를 해 먹는 보람보다 '맛난 것을 보았다'는 경험이 더욱 요긴하며 위안이 되는 것이다.

밥에 관한 한, 여성은 꽤 오래전부터 갈림길에 서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밥으로 대표되는 집안일에서 벗어나 나만의 무언가를 통해 존재 의미를 찾고 싶어 했다.

이제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아내에게 아침 얻어먹고 출근하는 남자가 20여 년 전부터 줄어들더니 마침내 희귀동물처럼 멸종 직전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밥상' 하지만 이마저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수 있다. 아들 세대에는 요리 솜씨가 결혼의 필수 스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언젠가는 결혼한 딸이 '아빠 밥상'을 그리워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아내는 TV 속의 남자들과 남편을 번갈아 보며 생각할 것이다. '눈치 없기는…. 저런 흉내라도 내보면 얼마나 좋아?'

휴일에 끼니때가 되면 자연스레 리모컨을 찾는다. 예전에는 밥상을 마주하고 TV를 켜면 당연이 채널은 그 날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로 고정되었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그 뉴스를 보다보면 밥이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힘들던 그 언제인가부터, TV속 요리 프로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다.

이렇게 굽고 지지고 볶고 TV화면 속 '그림의 떡'임에도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맛집을 언젠가는 가보리라는 다짐을 끝내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먹방'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그 시점이다. 당장 우리 집만 해도, 밥상머리에 앉아도 대화 한 마디 하기 힘들어 서먹한 관계를 메우기 위해 허겁지겁 '먹방'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엄마의 밥상머리에서 투정도 부리던 아들이 결혼 후에 제 식구를 데려 오더니 청소기를 돌리기도 하고, 밥 먹은 빈 그릇을 주방에 들고 가 심지어 설거지를 돕고, 외출이라도 하려하면 기저귀 가방 둘러메고 아이안고 나서는 아들 녀석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가시가 되어 찝찝한 게 솔직한 부모의 심정이다.

 삶의 고단함과, 고달픔과 반비례하는 '먹방', 그 흐드러진 잔치가 끝나고 나도, 어쩐지 마음의 허기는 여간해서 가시지 않는다.

장 은 수

탄부 장암 출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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