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광복절에 읽다
'암살', 광복절에 읽다
  • 편집부
  • 승인 2015.08.14 15:08
  • 호수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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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구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필자는 이 '명언'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주목적은 '흥행'이기 때문이다. '흥행'이 돈과 유명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는 한, 영화가 그 어떤 주제를 담아내고 또 그 어떤 주장을 뱉어낸다고 하더라도 그저 만들어진 '가능적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허구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한다. 사실이 아니라서 사실로 대우받고 싶은 생각도 없을 것이고, 또 그러하여서 '사실성'이라는 잣대에 의해 시련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저, 극본을 만든 작가의 머릿속에서 흘러내린 메시지를 다양한 장면들로 만들어 연속적으로 늘어뜨리면서 관람객의 입맛에 맞을까 맞지 않을까를 연신 되묻는 중에 '조작'해 놓은 결과물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이나, 그리고 영화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이슈와 상황들'에 대해 그 어떠한 비난이나 비판을 가한다할지라도 비난이나 비판으로 되돌아올 위험은 거의 없게 된다. 또 그런 이유에서 영화는 어떤 '현실'을 재현하고 만들어낼 때 비난이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가치비판이나 이념비판 등을 아주 자유롭게 펼쳐낼 수 있는 '장'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그러한 시각을 안전장치 삼아 '암살'이라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혹시나 숨겨놓은 메시지가 있을 법도 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이 논의의 함수를 풀어가는 변수가 두 개를 넘어 세 개와 네 개가 되면 그저 혼란에 빠지게 되어 논의 자체를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허구성'이라는 안전벨트 안에서 뛰놀 수 있는 자유와 정의의 선포는 적어도 독재 시대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이다.
독재의 시대에는 독재자의 느낌과 생각이 법이자 국가의 정의가 된다. 아주 오래 전, 우리나라에도 독재의 섬뜩했던 시대가 있었다. 필자의 기억에 남는 우스운 사건이 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잡혀간다'는 유언비어가 넘쳐나던 일이다. 그 노래에는 비도덕적이고 천박한 사고가 담겨 있기 때문에 부르지 말라는 독재자의 '교지(敎旨)'가 있었다는 후문이 돌면, 전 국민들은 그 노래를 입 밖에는 물론 생각 속에서조차도 지워야했던 기억이다.
오늘날에야 자유와 정의의 선포가 보장된 시대 아닌가! 그러니 제한된 노래도 없고, 말할 수 없는 사실도 없고, 비판하지 못할 역사적 사건들도 없다. 지난날의 모든 사실들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될 수도 있다. 높은 것이 낮게 될 수 있고, 낮은 것이 높게 될 수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이란 독립투사이다. 영화는 이 사람에게 많은 장면을 할애했다. 김구 선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김원봉 그 사람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분명히 김원봉이란 독립투사는 필자가 배운 역사 교과서에서는 감춰져온 인물이다.
누가 무엇을 왜 감추었느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감춰진 것이 무엇이고 그것의 사실여부를 역사가들은 이제라도 천착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독재의 시대가 아닌 오늘날, 역사가에게 제한된 연구논문 주제는 없을 것이고, 비판하지 못하는 성역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실을 사실로 탐구하지 않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 역사가가 있다면, 그는 억압에 의한 왜곡이 아니라 출세와 부귀영화를 위한 역사가로서의 '변절자'임이 분명하다.
'암살'의 '염석진(이정재 분)'은 필자의 눈에는 '변절자'로 보였다. 그의 변절은 왜곡된 시대가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 결과라고 그 스스로 말했다. 일제가 패망할 것을 몰랐기에, 그 위대하고 강한 일본의 군대가 총칼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염석진은 왜곡된 시대를 진실의 시대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자 했고, 왜곡된 현실에 충성하고자 했다.
'암살'되어야할 '염석진'이 비단 그 '염석진' 한 명에 그쳤을까? 영화는 그 시간상의 제한으로 많은 사건을 다룰 수 없다. 그래서 예술은 '대표성(전형성)'을 활용한다. 암살되어야 마땅할 왜곡된 역사적 죄인들을 향한 '사형(死刑)'을 '염석진'에게 영화는 모두 다 담아내었다. 필자의 감상이요 느낌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이 70년이 되었다. 둘째라면 서러워할 독재자로 이름난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짓겠다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을 '지시-필자의 느낌으로-'했다. 당시 고교1학년이었던 필자도 600원을 '바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독립기념관'을 짓느냐는 것이 어린 소견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립기념관 건립본부가 있던 용산의 국제빌딩(601호로 기억된다)에 직접 찾아가 아무나 붙들고 말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왜 기념합니까? 그게 그렇게 기념할 일입니까? 반대로 말하면 일본이 우리를 그렇게 비참하게 짓밟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는 셈 아닙니까?' 필자는 어린 마음에 이왕이면 '민족대웅전'이나 '조국번영관' 같은 미래지향적인 이름을 기대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주최측의 반응은 '학생, 알았으니 가서 기다리세요'였다. 그리고 필자는 아직도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대답을 기다린 지 35년이 지났다. 그리고 필자는 여전히 천안의 독립기념관은 가질 않는다. 필자의 마음속에는 '민족대웅전'이 지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꾼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좋은 영화 한 편이 비록 인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일지는 몰라도, 광복70년을 준비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에게 누가, 어떻게, 왜 그 처절한 총격전을 벌였으며, 또 그들을 누가 왜 어떻게 잡아들여 때리고 고문하고 죽였는지를 단 한 순간이라도 고민하게 하는 힘 정도는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필자의 어린 중학생 딸과 영화를 보며, 우리는 서로의 손을 몇 번이나 꼭 쥐었는지 모른다. 분노의 한숨을 쉬며, 통곡의 눈물을 훔쳐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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