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회, 계(契) 이야기
청우회, 계(契) 이야기
  • 편집부
  • 승인 2015.04.01 19:33
  • 호수 2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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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농한기가 되면 아버지는 계(契)모임에 가셨다가 이따금 불콰한 얼굴로 돌아오시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1961년) 때로 기억된다. 보은군 탄부면 장암2리에서 같이 자랐던 친우 (親友) 11명이 만든 『청우회』라는 이름의 계는 올해로 54년이나 됐으니, 아마도 보은에서 가장 오래된 모임이 아닌가싶다.

계는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던 협동 단체이다. 한자로 ‘계(稧)’ 또는 드물게는 ‘계(禊)’라고도 쓰인다. 계는 농촌 주민의 필요에 따라 예로부터 자생적으로 발생, 유지된 집단인데, 두레 · 품앗이보다 보편적이고 활발한 형태였다.

계의 발생 시기는 삼국 이전에 성립하였다는 설, 신라 ‧ 고려 ‧ 조선시대의 성립설 등 시대 설정이 다양하게 주장되고 있어 추정하기 어렵다. 특히 조선시대 이전의 자료는 드물기 때문에 계의 기원에 대한 학설이 더욱 분분하다.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계는 계원의 상호 부조 · 친목 · 통합 · 공동 이익 등을 목적으로 일정한 규약을 만들고, 그에 따라 운영된다는 점에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계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이익 내지 기능 집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계는 촌락이나 도시와 같은 지역 사회 자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해 또는 여러 가지 득실을 공동으로 추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하나의 기능 집단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초등학교 4~5학년 머슴애들이 어른들을 흉내 내어 쌀 한 말씩을 모으니 한가마니가 조금 넘었다. 당시엔 말만 계주들이지, 어른들이 관리를 하셨다. 배고픈 시절이라서 대부분이 쌀로 거래가 되었고, 3~5부로 이자가 잘도 불어났다. 계를 하는 날은 어른들의 잔칫날이었다. 자녀들이 모은 종자돈이니 어른들도 신이 나셨고 마을잔치가 된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끼리 만든 정관이긴 하지만 ‘100리 이상 이사 가면 회원에서 제외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런데 L 친구가 청주에 소재한 중학교 입학을 위해 가족이 모두 이사 간다기에 우리는 원금인 쌀 한 말을 갖다 주며 탈퇴를 권유했다. 결국 철없는 아이들은 그 친구를 탈퇴시켜 청주로 보냈다. 어렸을 때는 청주와 대전이 엄청 멀었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못 만나는 줄로 알았다.

어느덧 회원들은 어엿한 청년이 되어 한사람씩 결혼하면서 쌀 한 가마씩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청주의 친구 결혼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그때야 철이 들어 기존 회원들과 똑 같은 조건으로 쌀 한가마니를 결혼식 날 안겨주면서 서로의 오해를 풀고, 우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부산에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 일행은 부산까지 달려가 비를 맞아가며 회원들이 모여 장례를 모시기도 했다

모두들 직장 따라 서울, 부산, 대전, 청주 등으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기에 연중(年中) 한두 번씩은 계를 이유로 만나며 우정을 꾸준히 쌓아간다. 부모님들 회갑에도 회원마다 쌀 두 가마씩 축의금을 하는 등, 쌀 한말이 세 가마니로 새끼를 쳐 되돌아온 셈이다. 자녀들이 결혼할 나이가 될 쯤에는 밑천이 달려 축의금은 주머닛돈을 끄르기도 했다.

살아오며 재미있고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니다. 두 친구가 유명을 달리한 아픔도 있다. 대전의 친구 아내가 투병생활을 할 때는 곗돈을 닥닥 긁어 위문도 했지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회원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땐 구슬픈 상여소리가 마을 분들을 울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중년이 되어 제주도를 비롯한 설악산, 포항 영일만이며 20년 전에는 말만 들었던 팔공산에서 처음으로 무인 모텔에서 물침대를 경험했던 이야기는 두고두고 화젯거리다. 이 계모임에서는 국내는 물론 중국, 하와이, 베트남 등 해외여행도 심심찮게 다닌다. 남편들 중심으로 된 모임이 이제는 아내들이 더욱 적극적이고, 만나면 밤새도록 이야기보따리를 푸느라 밤잠을 설치곤 한다. 역사가 있는 ‘청우회’는 우리의 일생에 큰 웃음과 건강까지도 선물할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소중하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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