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비굴
교만과 비굴
  • 편집부
  • 승인 2014.12.24 09:37
  • 호수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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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인

12월 들어 눈 내리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더니 얼마 전엔 폭설이 내렸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그것도 아주 조용한 가운데 이 넓은 세상을 이렇게 다른 세상으로 바꿔놓는 자연의 위력은 그저 경탄스럽기만 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저를 키워주었던 나무의 주변을 갈색 이불처럼 덮어주던 낙엽들도 흰 눈 속에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새 봄이 올 때까지 그렇게 누워서 대지에 닿은 부분부터 먼저 거름이 되어 뿌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겨울이 숭고하다 함은 바로 이렇게 소멸을 통한 새로운 생명을 말없이 준비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즈음 정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학의 교수가 성추행 혐의로 구속되는가 하면, 한 재벌가의 딸이 수 백 명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제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어이없는 행동으로 나라 안은 물론 나라 밖으로부터도 큰 망신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긍정적인 내용보다는 부정적이고 또한 엽기적인 사고와 사건 소식이 넘쳐흐릅니다. 이래저래 어렵게 살아가는 민초들은 반갑지 않은 세상 소식으로 인해 더욱 힘이 빠지면서 세모의 찬바람 속에서 묵묵히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주변은 차갑고 고즈넉한데 이런저런 너절한 세상사는 마음을 영 편하게 하질 않습니다. 황당하고 분개하는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책을 펼쳤더니 마침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은 한 사람을 현명하게 하여서 뭇사람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지만, 세상에서는  내 잘함을 뽐내어서 남의 모자람을 드러낸다. 하늘은 한 사람을 부유하게 하여서 뭇사람의 가난함을 건지게 하건만, 세상에서는 내 가진 것을 믿어서 남의 가난함을 업신여기니 진실로 하늘의 무찌름을 받을 사람들이로다."

'채근담' 전집 218장의 내용입니다. 문득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가 아주 깊은 병에 걸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 채근담은 중국 명나라 때 저작으로 그때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왕권국가인데 반해 지금의 대한민국은 평등사회이고 민주주의 국가라는 차이 때문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국가와 사회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옛날의 모순과 부조리가 횡행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잘못이 아닌 바로 오늘날 우리 스스로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보 경제학계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수가 얼마 전에 타계하셨습니다. 그분은 현대한국사회의 팍팍한 삶을 세 개의 핵심어로 요약했는데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단함은 생산과정의 불합리에서 발생하고, 억울함은 분배과정에서의 불공정이 원인이고, 불안함은 2차 분배과정인 복지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그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세력이 이를 해소하기위해 노력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비인간화, 양극화가 심화되는 이 시대에 들려온 그의 부음(訃音)은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더욱 오래 오래 남을  것입니다.  

이 사회의 많은 불의와 부조리는 대부분 불합리한 '갑을'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 삼는 '갑'의 교만은 실은 '을'의 비굴이 있기에 더욱 심해지고 커집니다. 갑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을이 다수인 까닭에 '갑'의 교만은 바로 성토되지만 '을'의 비굴은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풍토가 지속되면 '갑과을' 모두에게 미움과 원망만 커지면서 세상은 그야말로 오탁말세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새로운 길이 필요합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는 성현의 가르침은 시공을 가로질러 현재의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할 귀한 가르침입니다. 유리한 자가 교만하고 불리한 자가 비굴한 것은 완전하지 인간성의 태생적 한계 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뜻있는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체제입니다.  밝아오는 새해 우리 모두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덜 교만하고 덜 비굴한 존재로 거듭나면서 우리 사회를 보다 모범적인 사회로 가꾸어 나가는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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