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 편집부
  • 승인 2013.12.05 09:48
  • 호수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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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인(보은황토문화연구회/보은장신)

12월입니다. 열두 장짜리 달력이 달랑 한 장만 남았습니다. 처음에 열두 장이 함께 있을 때는 제법 묵직하고 든든해 보였는데 이제는 홀로, 그것도 오그라든 상태로 탈진한 모습입니다. 열두 장짜리 달력이 반으로 줄었을 때는 그래도 반이 남아 있어 여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반환점을 넘어선 마라톤 선수가 갑자기 체력이 고갈되듯이 여섯 장에서 다섯 장으로, 다시 네 장으로 점점 외롭게 될수록 달력이 오그라드는 모습이 심화됩니다. 문득 사람이나 무생물인 달력이나 세월 앞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납니다.

2013년 올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여느 한해가 시작될 때 보다 더욱 큰 기대를 가졌던 것은 아마도 새로운 정권이, 그것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따른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분이 대통령에 당선 된 지 1년이 됩니다. 남은 임기는 4년이 조금 더 넘으니 지금은 열두 장짜리 달력으로 치자면 춘삼월에 해당합니다. 앞으로 꽃향기 가득한 늦봄, 싱그러운 녹음의 초여름,  오곡백과 여무는 가을, 그리고 곳간이 가득한 초겨울이 남아있으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마는 세상사가 달력 속의 그림이나 사진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로 전개될 수도 있으니 마냥 기대감만 가져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센까꾸열도라는 섬 때문에 중국과 일본이 대립하는 것을 우리로서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가볍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입지를 지극히 곤혹스럽게 하는 난제중의 난제로 변환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외교와 국방, 통상을 관장하는 모든 공직자들이 밤을 새우며 지혜로운 대책을 모색해야 할 상황입니다.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오직 수출에 힘입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는 국제 정세가 요동치면 그 어느 나라보다 국민의 생존이 위협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요즈음입니다.

국내 상황도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은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하지만 이미 이와 관련된 정치권의 지루한 공방은 대다수의 국민을 피로하게 합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우리 사회가 점점더 경직되어가는 현상입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정부였기에 실망도 클 수 있고 또 생활이 쪼들리니 불만도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망감과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그것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매도하는 것은 고귀한 땀과 희생으로 이룩한 우리의 근간을 위협하는 위험하고 저열한 짓입니다.

안과 밖이 어지러운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에는 먼저 내치(內治)가 안정되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36년의 질곡은 조선 말기의 부패한 내치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1893년 보은 땅에서 불끈 솟았던 동학취회는 조선 정부의 실정을 탄핵하는 민중의 평화적 집회였고 그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된 어윤중은 민중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수렴하여 중앙정부에 전달함으로써 보은취회를 평화적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정부에 대한 쓴 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선구적인 자세는 오늘날의 위정자들이 배워야 할 역사의 전범(典範)입니다.       본격적인 겨울을 앞에 두고 나무는 오히려 알몸이 되었습니다. 저렇게 철저하게 비워야 다시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자연의 진리를 나목(裸木)은 말없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특정 국가의 이름을 거론해서 그 나라 국민에게 미안하지만 소말리아 같은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대열에 오른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욕망은 탐욕으로, 탐욕은 부정으로, 부정은 멸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장만 달랑 남은 달력은 이제 곧 열두 장짜리 두툼한 달력으로 교체될 것입니다. 하지만 욕망을 조절하는 도덕적 기능이 마비되면 대한민국은 다니엘 튜터의 책명처럼 룏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한 장만 달랑 남은 달력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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